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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문화/건강

청동기시대 상징 고인돌, 성혈(性穴) 또 발견

오재영 기자 입력 2020.04.01 14:21 수정 2020.04.01 14:37

- 북두칠성 별자리 성혈, 남근석(男根石)으로 추정되는 돌도 발견 -


 

낙동강 상류 경북 문경시 금천 주변에 기원전 1,000년 무렵에 존재했던
청동기시대 유적인 고인돌(支石墓)과 성혈(性穴=홈구멍=알구멍, cup-mark)이 다수
또 발견되었다.

이곳 금천 일원은 청동기시대 상징물인 고인돌과 성혈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2012년 본 향토사연구위원이 이미 보고되어 있지 않은 고인돌과 성혈을 새롭게 찾아내어 보도한 적이 있었고 이 보도를 보고 전국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학생과 연구자들이 다수 다녀가기도 했다.

  
  
이번 이 새로운 청동기시대 유적을 발견하게 된 동기는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는 이른 봄날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두문불출하다시피 지내다
답답한 마음에 혼자서 청대 권상일 선생께서 경영한 청대구곡을 탐방하면서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한 제8곡 성암(筬岩)이라는 각자(刻字)를 찾아보던 중 전번부터 궁금했던 시내 건너편 논바닥에 있는 두 개의 바위를 살펴보기로 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순간 느낌이 이것은 일반 자연석 바위가 아니다. 고인돌일 가능성이 있겠구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실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긴 세월을 말해주는 듯이 이끼가 끼어있고 꽤 높이가 있어 힘들게 바위 위로 올라 살펴보았더니 다수의 성혈이 보였다. 아무래도 고인돌 규모가 상당한 것으로 보아 부족장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며 덮개돌(上石) 위에 성혈이 새겨져 있었다.

이튿날 줄자를 가지고 가서 측정한 결과
“대형 고인돌 1”의 규모는 높이 265cm, 폭 685cm, 둘레 1,610cm이며 바위는 총 7개 이며 크게 두 부분으로 갈라져 있는데 동쪽은 3개, 서쪽은 4개로 분리되어 있다. 그 외 아랫부분에 기단석 또는 지지석(支持石)으로 보이는 것들이 함께 있다.

  
          
성혈은 긴 세월 동안 풍화되고 이끼가 두껍게 껴 분별하기가 어려웠지만 39개가 새겨져 있었으며 성혈의 크기는 다양하지만 가장 큰 것은 직경 10cm, 깊이 6cm였다.

“대형 고인돌 1”에서 20m 떨어진 곳에 이것보다는 규모가 조금 작은 고인돌이 있는데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 유물이라 알 길은 없지만, 족장의 부인 무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대형 고인돌 2”의 규모는 높이 213cm, 폭 388cm, 둘레 1,357cm이며 크고 작은 바위는 총 7개(대형 2개, 소형 5개) 이며 무너진 상태로 흩어져 있고 그 외 아랫부분에 지지석으로 보이는 바윗돌이 함께 있다.

성혈은 3개가 새겨져 있으며 확실한 모양을 갖춘 1개의 크기는 직경 8cm, 깊이 3cm였고, 2개는 풍화로 마멸된 성혈인지 아닌지 판단이 모호하였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대형 고인돌 1”아래에서 남근 모양의 돌을 발견하였다.
만약 이 남근석이 성혈(알구멍)과 한 세트라면 성혈이 무엇을 의미한가에 대해 지금까지 태양, 별자리, 여성의 성기, 알, 구멍 등으로 논란이 있었는데, 이 남근석이 기자신앙(祈子信仰)으로 여성의 성기와 남근이 결합하여 있는 오래된 유물이라 판명된다면 이것은 세계적인 대 발견이 될 것이며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적 의식의 표현물로 성혈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 되어
이미 분분했던 학계의 논란을 잠재우는 획기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남근석의 크기는 길이 18cm, 직경 4.5cm(좁은 쪽 3cm), 둘레 13cm이다.


 이 남근석을 발견하게 된 것은 고인돌 사이와 주변에 있는 돌 하나 풀 한 포기가
3천여 년 전의 역사를 말해주는 귀한 것이라 조심해서 살피던 중 바위 틈새에 이상하게 생긴 돌이 있어 성혈이 다산을 비는 행위였다면 이 돌의 쓰임새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다시 말해 알구멍은 음(陰)이고 남근석은 양(陽), 아! 그래 이건 남근석이다! 나도 깜짝 놀랐다. 청동기인들이 음양의 이치를 그때 이미 알았을까?

이 남근석의 발견으로 흥미와 궁금증이 더해지고 8년 전 새로운 고인돌과 성혈을 발견해서 보도할 때도 그랬지만 이 금천 일원의 선사시대 유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전문가에 의한 정밀조사와 제대로 된 발굴이 이뤄져야 하겠다.

또 하나의 특징은“대형 고인돌 1”이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처음 만들 때 큰 바위가
하나이든 것이 여러 개로 갈라진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7개의 바위로 만들어진 것인지가 궁금하든 차에 바위와 바위 틈새에 쐐기돌이 보였다. 그렇다면 3단 구조의 아주 특별하게 조형된 고인돌인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약 정밀 조사 후 사실로 판명되면 또 하나의 유명 고인돌, 연구대상이 되는 고인돌이 될 것이다.  
                                                                                          
      
며칠 뒤 금천 주변을 더 살펴보기로 하고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고인돌이나
성혈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유적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았더니 산양면 소재지 건너편 강변도로 아래 청대구곡 제6곡 구잔(溝棧)에 제방 공사를 할 때 일부가 묻힌 상태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높이 232cm, 폭 850cm(긴 쪽)의, 둘레 1,850cm의 큰 바위(고인돌)에도 성혈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혈이 별자리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북두칠성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렇듯 제대로 모양을 갖춘 북두칠성 별자리 성혈은 아주 희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성혈 숫자는 26개 여였으며 가장 큰 성혈은 직경 9cm, 깊이 3.5cm였다.

   
             

그리고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된
청원정(淸遠亭)과 소천서원(蘇川書院)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청대구곡 제9곡인 소호(蘇湖)인데 지난해 겨울에도 거기에 지석묘의 덮개돌로 추정되는 성혈이 새겨진 알바위가 있었는데 금천생태복원사업으로 제방 공사를 하면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바라건대 금천 42.85km 중에 산양면 현리에서부터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까지 성혈이
분포된 사실을 근거로 금천은 선사시대 청동기인들의 거대집단의 광범위 거주지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선사유적지이며 문화관광 자원이 될 수 있음으로 고고학적으로 본격적 발굴 및 학술적인 규명이 뒤따라야 하겠다.

마무리하며 한 번 더 관계 당국에 말하고 싶은 것은
이미 발견된 소중한 청동기 유적에 대한 훼손을 막는 보호 대책과 안내판 등을 설치하고
무너진 채로 있는 고인돌도 본래의 형태로 복원하여 문화재지정 및 관광 자원화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라진 소천서원(蘇川書院) 옆 강변에 있었던 성혈석을 되찾아 원래 있던 자리에 놓일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오재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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