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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만인소’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7.03 14:20 수정 2017.07.03 14:20

아시아·태평양 등재 추진한다 아시아·태평양 등재 추진한다

유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조선 시대에 만인(萬人)이 뜻을 모아, 만인소(萬人疏)를 만들어, 그 당시의 정부에 청원한다는 것 실록에 기록될만하다. 만인소는 요즘 말로하면, 국민들의 청원을 당국에 알리기 위한, 일종의 민원과 같다. 그땐 또한 독자가 만 명이나 되는 언론과 같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 그때의 인구비례로 따진다면, 상당한 독자이다. 여론의 소통과도 같다. 당대의 가치도 여론이 지배했다면, 조선시대의 만인소도 유생(儒生)들이 뜻을 모아, 그 당시의 정부에 건의하고, 일반백성들의 삶을 알리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만인소는 선비정신의 발로로 만들어졌다. 만인소(萬人疏)는 조선시대 유생(儒生)들이 행한 정책상 의사발표의 장이다. 정부의 정책에 강력한 반대 여론을 일으키는 방법의 하나였다. 유생들이 만인 내외의 공동명의로 정부에 의견을 제시했다. 순조 23년(1823)에 유생 9,996명이 서얼(庶孼)도 임용해 줄 것을 상소했다. 철종 6년에 유생 10,432명이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추존을 상소했다. 고종 18년에는 김홍집(金弘集)이‘조선책략(朝鮮策略)’을 바치면서 정치 개혁을 주장했다. 또한 일본 의존, 러시아 경계도 청원했다. 영남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이 만인소를 올려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같은 문서는 그때만 해도, 문헌의 소중함보다는, 그 내용에만 시선을 모았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지금은 내용에다 문헌의 소중함이 보태져, 희귀성을 더한다. 현대적인 의미로써, 소통, 여론 조성, 잘못하는 정부에 대한 질책성은 기록유산으로 후손들에게 남겨야할 자산이다. 남기되, 세계로 알려 우리의 전통기록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알릴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이용두)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유네스코 아·태기록 유산)등재를 위한 국내 후보로 ‘만인의 청원, 만인소’를 선정했다. 등재 여부는 내년 5월 개최 예정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기록유산 총회’(MOWCAP)에서 최종 결정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및 아태지역 목록 국내 후보 선정을 담당하고 있는 문화재청은 2019년에 등재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대상 2종과 2018년에 등재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태지역 등재대상 2종을 선정해서 발표했다. 여기에 한국국학진흥원이 신청한 ‘만인의 청원, 만인소’가 포함됐다. 만인소 원본이 남아 있는 것은 1855년(철종 6) ‘사도세자 추존만인소’와 1884년(고종21) ‘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뿐이다. 이 2종의 만인소는 각각 ‘도산서원’과 ‘옥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가,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존·관리한다. 이번에 아태기록유산 국내 후보로 선정된 기록물은 현존하는 2종의 만인소 원본이다. 이번의 만인소는 조선시대 재야 유교 지식인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진 공론정치의 결과물이다. 그 자체로써 사료적 가치의 평가를 가진다. 조선왕조는 유교이념에 따라 지식인들이 왕에게 직접 청원할 수 있는 언로(言路)를 보장했다. 국왕은 이러한 청원에 따라, 조선사회의 정치적 요구와 사족 등의 동향을 파악하는 기본적인 자료의 역할로 삼았다. 만인소는 이 같은 정치문화 속에서 재야 유교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만여 명에 이르는 공론을 모았다. 이를 백성인 민의(民意)의 이름으로 왕에게 직접 전달했다. 각각의 내용은 사안에 따라 다를망정 유교이념을 체득한 재야 지식인들의 실천적 정치활동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산물이다. 그 당시의 조보(朝報)는 승정원에서 소식들을 필사(筆寫)하여 배포했다. 갑오개혁 때에 근대적 인쇄술로 가 나옴에 따라 조보는 없어졌다. 만인소는 일정 부분 요즘의 신문과 같은 역할을 도맡았다. 언론의 조상이다. 이번에 등재를 추진한다면, 조선의 언론과 문헌을 전 세계로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관계당국은 등재에 행정력을 다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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