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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가정의 위기 = 국가의 위기

세명칼럼 기자 입력 2017.12.25 12:45 수정 2017.12.25 12:45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오두막이라도 사람이 살면 당연히 ‘집‘이요, 건물을 어리어리하게 지어도 짐승이 살면 집이 아니라 ’우리‘에 불과하다.지난날엔 보잘 것 없는 누추한 집에 살아도, 집안에 가족이 있고 가족애가 넘쳐나, 그야말로 보금자리, 집이었다.요사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으리으리한 고급 주택에 살지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없고 자식들도 부모에 대한 효심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요사이 이 땅의 가정은 집의 기능을 상실하고, 배부른 짐승들이 사는 우리가 되고 말았다.필자의 유년·청소년 시절은 사철 추운 극빈 속을 살아 왔지만, 어머니와 누나들과 필자의 네 식구가 있었기에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며 살아서, 막연한 현실 속에서도 내일을 포기하고 살진 않았다.겨울엔 땔감(장작)이 없어 따뜻해야 할 아랫목이 온기가 없이 추웠고, 늘 양식이 없이 잡곡밥도 배불리 먹지 못했지만, 식구들의 얼굴만 봐도 행복한 미래가 꼭 있을 것이란 착각(?)을 굳게 지녔다.철판 같은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교육대학을 고학(苦學)하는 쿠데타를 단행하여, 밑바닥이 없이 추락한 가난을 벗어나, 경제적으로 중학(中學)의 수준까지 도달 할 수 있었다.고학을 선택한 것도, 버거운 현실과 당당히 겨룬 것도, 홀어머니의 격려가 큰 힘이 되어 주셨다.지금 못 산다고 탄식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필자의 유년 청소년 시절보다 경제적으로 더 다복한 이들이 많다.부천의 젊은 부모가 어린 아들(7세)을 토막 낸 것도,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참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이 땅 부모들 일부는 자식을 자기의 노리갯감, 부속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하찮은 생활고에도 부모가 자식을 먼저 죽이고, 가족이 동반자살을 하기도 한다.비록 부모가 자식을 기르지만, 자식은 부모의 부속품이 아닌 독립된 생명체요, 인격체임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꼭 부모가 죽고 싶다면 자기들만 죽고 자식은 살려두어 국가 사회기관에 생계를 위탁해야 한다.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어린이에 대한 사고가 잘못 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기의 손순은 노부모의 밥을 갈라 먹는 아들을 처치하기 위해 산속에 매장할 땅을 파다가 석종(石鐘)이 나와, 아이를 묻지 않고 석종과 같이 집으로 데리고 왔다.석종을 집에 달아 놓고 울리니, 청아한 종소리가 궁궐에 흘러 들어가 흥덕왕 귀에 까지 들려, 내력을 안 임금님은 손순에게 푸짐한 하사미를 내려 온 가족이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요사이는 부부가 맞벌이하는 경우가 많아, 육아문제가 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진작부터 대두하게 됐다.상원이는 부부공무원의 맏아들로 나이가 네 살 밖에 안 되어, 엄마 아빠가 출근하게 되면 돌봐줄 어른이 있어야 했다.상원이는 조부모가 있었지만 조부는 이사관 출신 경력의 고관이었고, 조모도 기품 있는 귀부인이라 신병을 비자하여 손자를 봐줄 수 없다고 아들 며느리 손자 앞에서 냉정하게 선언했다.그 때 네 살 박이 상원이는 울먹이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누가 저를 사랑해 줍니까?”네 살 박이 손자 상원이의 당찬 하소연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항복하고 말았다. 그 휴유증으로 상원이 엄마는 상원이 고모에게 닦달을 당해야 했다.네 살짜리가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이건 틀림없이 올케가 시킨 게 틀림없다고 다그쳤다.상원이가 한 말은 누가 시킨 말이 아니라, 상원이 스스로가 한 말이었다. 상원이는 나이가 네 살이지만 한글교사가 가정을 방문하여 단 한번 한글을 가르쳤지만, 그 날 한 번 만에 한글을 마스터한 영재, 신동이었다.오늘날 가정의 위기는 가정 전체보다 자기의 안일만을 고집하는, 가족애의 실종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고 본다.가정이 건전해야 국가도 건강하다 오늘날 가정의 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이기도 하다. ‘우리’같은 집에 살던, 지난날의 가족애가 새삼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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