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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사회

기생 ‘홍도묘비’어디로?

이상만 기자 입력 2016.12.06 20:28 수정 2016.12.06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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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명했던 기생 홍도(紅桃)묘비가 하루아침에 없어진 사실에 평소 지역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경주시청 건설과장인 최홍락씨가 어렵게 수소문 끝에 아파트공사로 건천읍 영호공원 납골당에 분묘 이장시 합동으로 안치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개인사비로 부부가 수 년 동안 제사를 지내준 사실을 뒤늦게 알고 지역주민들과 "경주 최씨 딸들의 모임인 명가회(회장 최재원) " 회원들이 한복을 입고 조촐하게나마 지난 21일 "동도 명기 홍도 제례식"을 엄숙히 가졌다.함께 제례식에 참석한 최영기(신라문화연구소장)씨는 경주에서 불국사 방면으로 가다 동방역 왼쪽 (경주시도지동 산627-1)산비탈에​ 산소가 있어 지난 1851년부터 해방이후에 기생 신분이 없고 난 뒤부터는 국악을 전수하는 지역의 판소리의 대가 명창 정순임씨의 모친인 장월중 선생님과 전국에서 몰려온 국악인들이 벌초도 하고 예를 갖추어 간단한 음식을 차려놓고 선생님을 위로하고 지내왔으나, 어느 날 묘비 윗쪽에 구역정리와 코아루 아파트공사를 하면서 비석은 두동강 난 체 포도밭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포도밭주인이 시멘트로 붙여 정교하지는 못하고 구부정한 상태로 무덤 앞에 세워 놓았다고 하며 비 앞에는 "동도명기홍도지묘" (높이120cm너비 50cm 두께20cm) 총 글자수는 3백88자로 시멘트로 접합한 가운데 부분의 한자는 알 수 없었다고 했다.묘비 비문에는 최계옥(崔 桂玉)1778~1822 자는 초산월(楚山月)로 아버지는 향리출신으로 가선대부에 오른 최명동,어머니는 경주의 세습기생이었고 정조2년에 태어난 그녀는 나이가 겨우 10세에 시(詩)와 서(書)에 통달하고 음율(音律)을 깨우쳤으며 14세에 얼굴과 제주가 모두 뛰어나 20세에 경주부윤의 추천으로 상의원에 선발되어 노래와 춤으로 장안에서 독보적인 가무 솜씨를 발휘하자 명성은 서울에 자자하여 이를 눈여겨본 정조의 장인이며 순조의 외조부인 박준원이 매우 좋아하여 외부(外婦로 삼자 당시 박원준은 쉰아홉 이었고 홍도는 갓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였다.정조(正祖)가 장인을 위로해 드리려고 별호를 내린 이름이 홍도(紅桃)이다. 홍도는 출입이 제한된 갇힌 몸이 되고 말았고 근10년간 이렇게 보낸 홍도는 얼굴이 야위고 근심이 가득찼다. 어느날 박준원이 그 이유를 묻자 홍도는 자신을 앵무새에 비유한 시를 읊었다."푸르고 붉은옷을 입은 새가 밤마다 하늘을 보고 울고 있구나 새장 속에 깊이 갇혀 있으니 어찌 여위지 않겠어요"홍도는 박원준과 11년간 같이 살다 그가 죽은 뒤 3년상을 치르고 고향 경주로 내려온 그는 악부(樂府)의 종사(宗師)가 되어 경주 교방에서 소리꾼, 기생, 악사 등을 가르치며 그가 궁중장악원에서 익히고 닦았던 실력을 후진양성을 위해 정성을 다했다고 설명했다.그 당시 경주부의 관기는 약 40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홍도는 상당한 재력도 있었고 특히 그는 시서(時書)가 뛰어나 문인들과 자주 어울려 고금을 논하고 시와 술을 즐겼으나, 홍도는 알 수 없는 병으로 고생하면서 후사가 없는 그는 붓을 들어 그의 모든 재산을 친척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라고 유서를 남긴 뒤 돌아갔다. 순조 22년 (1822)이며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다.재색(才色)을 아울러 갖춘 그였지만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체 사회적 굴레에 얽매어야 했다며, 선산이 있는 형제산 아래에 묘를 썼고 묘비명을 지은 최남곤은 그의 미모는 국내 제일이고 재주와 시문은 출중했다고 한다.최성춘(경주 황남동종친회장)씨는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철종 2년 (1851)에 교방제자들이 뜻을 모아 묘비를 세웠고 1990년에 홍도비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져 많은 국악인들이 그의 묘소를 찾아왔고. 기생무덤은 경주에 유일하고 전국에도 몇 군데 안되는 귀중한 유적이라고 봐야 한다며, 하루아침에 깜쪽 같이 없어진 묘비를 누군가 개발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묘비부터 먼저 없애 홍도묘는 묘비없는 무덤으로 방치되었다가 지난 2005년 3월에 무연분묘로 분류되어 개장 공고되어 그해 11월 홍도무덤은 무연 분묘라 하여 파헤쳐 화장한 뒤 영호공원납골당에 합동안치 시켜버렸다고 하며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양심마저 잃은 만행이라며,안치기간이 10년이 넘어 폐기할 처지에 복원예정으로 인수시까지 봉안협조를 부탁하고 있다고 한다.이와 같이 그 당시 이러한 내용을 문화재청에 알리게 되어 아파트 건설사로 하여금 홍도묘와 관련된 안내판을 세우고 흔적을 남기게 되었으나 얼마 후 계곡에 폐기하였다던 묘비를 찾기 위해 굴삭기를 동원했지만 찾지 못하고 대구지역 골동품으로 떠돌고 있다는 풍문만 들리고 있다면서, 스스로 역사도시라고 자처하는 경주에서 보고만 있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 향리와 문인들이 200년간을 지켜온 홍도묘를 파헤쳐지고 묘비마저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선조들에게 부끄럽고 지금이라도 각지의 예술인들과 문인들이 모여 홍도묘비사업에 동참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경주=이상만 기자 man1071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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