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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흥부는 실존인물이었다

안진우 기자 입력 2020.07.22 19:30 수정 2020.07.22 19:30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한글을 쓰는 것을 천하게 알고, 즐겨 한문을 전용했다. 한문을 즐겨 쓰다 보니, 중국의 허풍이 문장과 생활을 지배했다.
영세민 심봉사가 제사상을 차리는 걸 보면, 잘 사는 정1품 3정승과 다를 바 없다. 사실대로 적자면, 심봉사는 제삿밥 지을 쌀도 없어서 보리죽에 간장 한 종지, 물 한 사발만 진설했어도 조상의 혼령이 지극한 효성에 감동했을 것이다.
흥부전과 춘향전, 심청전은 명작 한글 소설이지만, 지은이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고대(古代)에는 작가의식이 부족하여 자기가 지은 작품에 작가 이름을 안 밝혔을 가능성도 있지만, 양반(사대부)이 서민들이 쓰는 언문으로 글을 지은 것이 알려지면 사문난적이라 하여 감당할 수 없는 공격의 화살을 맞기 십상이고, 이를 막기 위하여 무명씨로 본체를 숨겼을 가능성이 높다.
심청전은 서해안 바닷가 고을에서 생겼다고 가상을 해도, 흥부전과 춘향전은 전북 남원이 배경이고, 전해오는 설화로 봐서도 두 소설은 남원이 작품의 고향이다. 따라서 남원의 어느 몰락한 양반이 지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흥부전의 진실은 무엇일까?
조선 후기의 신흥 영농가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광작을 하고, 시장의 발달로 수공업품을 대량으로 생산 판매했다. 이를 배경으로 경제적으로 양반을 앞지르는 평민들도 나타나, 일부에서는 관직을 매수하여 양반 행세를 하기도 했다. 자기 땅이 없는 양반은 잘 사는 상민의 땅을 소작하기도 하고, 자신의 딸을 상민에게 시집보내 상민의 신분 상승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신분사회인 조선사회에서 하층민이 신분상승을 위해 애를 썼지만, 중농과 중상으로 돈을 번 부유한 농민과 상민만이 하층 양반이 될 수 있었다.
18세기 때 노비 이만강은 주인집을 탈출하여 양반으로 신분을 속이고, 대과에 급제하여 현감(종6품) 벼슬에 올랐다. 노비 이만강이 현감 엄택주로 위장했다가 본색이 드러나, 반상의 기강을 문란케 하고 임금을 속였다 하여 노비 환천으로 그친 게 아니라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뻥이 센 흥부전도 두 가지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하나는 가난한 아버지가 맏아들과 손을 잡고 불철주야 중노동을 하여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놀부는 무식꾼이지만, 동생 흥부는 아버지와 형님 덕분에 글공부를 하여 식자층이 된 것이다.
흥부전의 두 번째 진실은 무제한 출산이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먹고 살 복을 준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키울 능력도 없으면서 한 가구당 10명도 넘는 자녀를 마구 생산하게 된 것이다. 재산(토지)도 없으면서 마구 낳아 일 년 열두 달 내내 보릿고개일 수밖에 없다. 못사는 동생 흥부를 보살펴주지 않은 형 놀부를 후세 사람들은 곱게 보지 않지만, 놀부가 흥부에게 멋진 정답을 일러 준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 한다는 것이다.
요새 우리나라도 과잉(?) 복지국가를 지향하다가 등골 빠지게 생겼다. 복지도 무조건 무상복지만 밀어 붙일 게 아니라, 조건부 유상복지로 전환해야 한다. 자립정신을 훼손하는 복지강행은 국민의 자립정신을 죽이는 폭거다.
생선을 그냥 주는 복지는 무의미하다. 생선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진짜 복지다. 국민들에게 일일이 생선을 주는 것보다, 생선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생선이 먹고 싶을 때마다 자력으로 생선을 조달할 수 있는 것이다.
흥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자연보호자다. 다친 제비 다리를 부목을 대고 정성껏 치료해 주어 이듬해 제비가 박씨를 물고 와서 박을 심었다. 박이 가을이 되어 달덩이처럼 커지면, 박 속을 삶아 먹으면 그런 별미도 없다. 소박한 바람을 갖고 박을 심고, 가을에 다 익은 박을 타다가 금이 쏟아져 나와 돈벼락을 맞은 걸로 되어 있지만, 사실 이건 완전 뻥이다. 흥부가 부자가 된 것은 움막도 부실하게 지어 자주 옮기다 보니, 온 산 기슭이 흥부네 움막터가 되었다. 움막을 세우려면 최저 땅을 1m 깊이는 파야 한다. 움막 터를 판 것이 풍수지리상 형상이 제비 혈(穴)이었다. 이 제비 혈에서 사금이 쏟아져 나와 흥부는 벼락부자가 되었다.
흥부가 살던 곳은 전북 남원시 아영면 성리다. 성리 뒷산에는 흥부라고 추정되는 실존 인물 박춘보 산소가 있고, 박춘보 비가 박 흥부를 떠올려 준다.
필자도 행여 남원 갈 일이 생기면, 남원시 아영면 성리에 있는 박춘보공 유택을 꼭 참배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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