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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굳세어라 금순아’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1.04 16:49 수정 2017.01.04 16:49

2014년 1월 18일은 할머니 음력 제삿날이다. 날씨가 추워 목욕마저 망설여진다. 1951년 1월4일,1·4후퇴 서울이 두 번째 적에게 함락되었다. 집안에서 아랫목에 웅크리고 있어도 추운데, 보따리 이고 지고 추운 날씨에 피난길에 올랐으니 춥고 배고프고 그런 고난이 없고, 그런 난리가 없었다.그 때 필자는 만8세의 어린이로 국교3년생이었다. 이웃집들은 피난 간다고 야단들인데, 우리 집은 접도 곱도 못할 딱한 처지에 놓였다.당시 일흔 셋이던 할머니가 중한 신장병에 걸려 온몸이 짚동 같이 붙고, 얼굴도 벌에 쏘인 양 멀겋게 부어 올랐다. 할머니는 난리 중이라 치료도 제대로 못 받으시고 어머니의 병시중이 치료의 전부였다.청상과부던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병에 갖은 향토약을 구하여 병구완에 지성을 다하셨다. 우리집 식구는 숙부와 숙모, 돌도 안 지난 종매, 할머니, 어머니, 큰 누나, 작은 누나, 필자인 나, 이렇게 여덟 명인 대가족이었다. 식구들끼리 말도 오갔다. 중환자인 할머니와 볼 볼 우리 어머니를 집에 남겨두고, 나머지 여섯 식구는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한다는 의견이었지만, 누나 둘은 한사코 어머니와 같이 집에 남겠다는 거였다. 피난준비로 나(필자)를 위해 방한모와 솜 넣어 만든 핫바지, 벙어리장갑을 마련해 주셨다. 천만 다행으로 피난준비물은 안 사용해도 되도록 전세가 우리나라에 유리하게 호전되었다. 당시 우리 집은 방이 두 개 밖에 안 되었다. 안방은 우리 식구가 사용했지만, 상방은 2사단 예하의 소대본부로 내주었다. 상방에는 19살인 난 김영자 사모님이 남편인 윤상사님과 몇 명의 사병들이 각각 침낭속에서 잠을 잤다. 윤상사 사모님인 김영자 아줌마는 사변이 날 때 서울시내의 여학교에 다니던 여학생이었는데, 난리통에 학교를 등지고 전선의 철새로 전락했다.윤상사 사모님은 당시 열 살도 안 된 필자의 눈에도 그 때까지 본 여자들 중 가장 예뻤고, 말씨도 상냥한 서울 말씨로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마음도 따뜻하여 매일 보급 받은 소고기를 꼭 나눠주어, 병중인 할머니께 국을 끓여 드리게 했다. 김영자 사모님 덕분에 입맛도 없던 할머니가 좋은 반찬 덕분에 며칠을 더 연명하신 것 같다. 전세의 호전으로 2사단도 북진을 했다. 김영자 사모님은 “학생 부디 공부 잘 해요” 하시면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쓰리쿼터에 오르셨다. 김영자 사모님도, 윤상사님도 후일담은 알 수 없고, 어디에 계시든지 행복하시기만 빌 뿐이다. 어머니의 지극한 간병에도 할머니를 더 이상 붙잡아 두시지 못했다. 1951년 1월24일(음력 12월18일) 할머니는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운명한 그 날 오후 집 가까운 뒷산에 모셨다. 난리통이 되어 두서를 따질 처지가 못 되었다. 세상만사는 얽히고 섥혀, 관계가 지극히 복잡하다.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홍남철수가 이뤄지고, 뒤이어 1.4후퇴로 서울이 다시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중부전선은 문경에서 백여리 남짓한 거리인 충주까지 후퇴해 왔다. 문경도 풍전등화였다. 문경군청(점촌)에서 80리 상거한 동로면엔 북으로 달아나지 못한 인민군의 패잔병들이 집결하여 있었다. 피난을 가도, 겨울에 피난을 가지 않도록 국가안보를 단단히 다져야 한다. 얼마 전 가요무대에서 6.25때 국민에게 큰 위안을 주었던 ‘굳세어라 금순아’가 울려 나았다. 날마다 한길을 메웠던 그 해(1951년) 겨울의 피난민 행렬과, 국민방위군의 남행대열을 잊을 수 없다. ‘통일’은 좋아하면서 ‘복된 통일’준비는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 남북통일에 앞서 남남갈등 해결부터 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국민으로서 올바를 국가관을 가져야 한다. 행사 때마다 애국가를 열창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마다 국가에 대한 고마움과 감격을 느껴야 한다. 국기는 국가의 문패다.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면 문패를 달 수 없다. 집 주인만이 자기 대문에 버젓이 문패를 달 수 있는 것이다. 할머니 제삿날 날씨가 추워 목욕도 못하고 제사를 모신다. 할머니는 어렵게 세상을 사셨지만 두 아들은 두뇌가 천재였다. 명석한 두뇌는 후손에 까지도 큰 영향을 끼치셨다. 사진 한 장도 못 남기시고 세상을 전쟁의 와중에 떠나셨지만, 손자 손녀를 아끼셨던 고마운 마음은 손자인 제(필자)가 가슴깊이 간직하겠습니다. 6.25때 여덟 식구가 지금은 네 식구만 남았다. 남은 네 가족은 가정의 번영과 국가발전, 가족화목에 각별히 유의해야겠다. 필자는 요사이도 주제넘게 잠자리에서까지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애국가 가사처럼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가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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