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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세명일보 8·15 특집

신용진 기자 입력 2020.08.13 10:16 수정 2020.08.13 17:10

향토 박물관 자료로 알아보는
人間 安重根과, 한국 수탈의 원흉‘동양척식 주식회사’

↑↑ 안중근 의사.



↑↑ 박물관이 소장한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분도 전도.

↑↑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지분도1.

↑↑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지분도2.
↑↑ 김기한 영천 역사박물관장.


코로나19와의 끝 모를 싸움, 유난히 지루한 장마와 이상 폭우속에 맞이하는 8·15 ‘75주년’.
그래서 올해 광복절은 또 다른 아픔의 의미로 다가온다.
본지는 영천시 고경면에 위치한 ‘영천 역사문화 박물관’에 8·15와 일제시대 일본의 만행을 증명하는 여러 가지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됐다.
3대를 이어 자료를 모으고 관리해 온 ‘영천 역사문화 박물관’, 現 김기한 박물관장은 지금도 이 역사의 아픈 편린을 보관하고 유지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는 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소장 자료 중 일부를 발췌, 8·15 75주년을 되새기는 자료를 지상에 발표하기로 했다. 더욱이 이 자료는 향토 박물관 소장품이라 그 의의가 더 크다.<편집자 주>

■8.15 75주년 맞아 다시보는 人間 安重根
1910년 2월 22일자 일본 오사카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 7면에는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 변호사 미즈노 기치타로(水野吉太郞)의 수첩에 직접 적은 글’이 보도됐다.
△曲突徙薪無見澤(곡돌사신무견택) △焦頭爛額爲上客(초두난액위상객) △爲楚非爲趙(위초비위조) △爲日非爲韓(위일비위한)
△굴뚝을 구부리고 섶을 치운 이는 혜택이 없는데 △머리를 태우고 이마를 덴 이가 상객이 되었구나 △초(楚)를 위한 것이지 조(趙)를 위한 것이 아니라네 △일본을 위한 것이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네.
앞의 두 문구는 중국 역사책인 '한서(漢書)'의 '곽광전(藿光傳)'에 나오는 내용으로 '曲突徙薪(곡돌사신)'이란 ‘굴뚝을 구부려 놓고 굴뚝 가까이에 쌓아 놓은 섶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다'는 뜻으로 ‘화근을 미리 없애 재앙을 예방한다’는 의미이다.
뒤의 두 문구는 '곡돌사신'이라는 고사에 대한 안 의사 본인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미즈노 변호사는 안 의사에게 들은 글의 해설을 신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집에서 불이 났을 때 일이다. 화재의 근원인 굴뚝은 화도(火道)를 구부려서 만들고 모닥불은 서서히 지펴야 하는데, 누군가가 큰 섶나무를 가져다 놓은 것을 빨리 알아채서 화재를 미연에 방지한 선각자는 아무런 상도 혜택도 없다. 오히려 마침내 큰일이 난 다음에야 머리를 태우고 이마를 데며 허풍스럽게 불을 끈 구경꾼들이 상객이 되어 크게 대접받는다. 동양의 대화재는 아직 불길이 하늘을 태우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데에까지 이르지 않았다. 나는 이토라는 섶을 치워 한국이라는 굴뚝에 불이 나지 않도록 하였고 나아가서 동양이라는 하나의 가옥을 태우지 않도록 한 선각자이다. 즉, 하얼빈의 거사는 정치범이라든가, 복수적이라든가 라고 불릴 이유가 없고 동시에 비단 한국을 위해서 뿐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 한 것이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의 설명 인용)
안중근 의사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 기운에 응해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했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진해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운영해 집안은 부유했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했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三興學校: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했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했다. 이후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했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해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됐다.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중국 뤼순(旅順)에 위치한 뤼순형무소에 수감돼 이듬해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 3월 26일 형이 집행됐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했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휘호한 많은 유묵(遺墨)이 보물로 지정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고, 1970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에 기념관이 건립됐다.(두산백과 참조)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해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유언)
안 의사의 유해는 뤼순 감옥 죄수 묘지에 묻혔으나 아직도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 고국으로 봉안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수탈의 전초기지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12월 18일에 설립된 일본 기업으로, 일본 제국이 조선의 경제 독점과 토지·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세운 국책회사이다. 간단히 줄여서 동척(東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08년 제정한 동양척식회사법에 의해 세워졌으며 자본금 1천만 원으로 조선은 설립 자본금의 30%에 해당하는 국유지를 출자했지만, 주요 목적은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토지와 금융을 장악하고 일본인들의 식민지 개척 및 활동을 돕는 기관이었다.
처음 한국으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자본으로 출자 받은 후 토지 매입으로 1913년까지 4만 1148정보를 매입했으며 조선 총독부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으로 국유지불하에 의해 1917년말 7만 5178정보의 토지를 소유해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최대 지주가 됐다.
이후 1942년말에는 20만 722정보를 소유했다. 동척은 소작인들에게 5할이나 되는 고액의 소작료를 요구하거나, 춘궁기에 양곡을 빌려줬다가 2할 이상의 이자를 받는 등 경제 수탈에 앞장서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은 대한민국 해방과 더불어 미국문화원, 미국영사관으로 쓰이다가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하면서 1996년 미국연방정부에 의해 폐쇄되고 2층의 영사관도 철수했다.
미국은 그 후 이 건물을 비워둔 채 3년 동안 방치했으며, 부산광역시와 시민단체의 거듭된 반환요청에도 묵묵부답이었다가 1999년 4월 30일, 70년 만에 대한민국에 완전히 반환됐다. 약 3년간의 내부 공사를 거쳐 2003년 7월 3일 총 200여점의 유물과 2개의 전시실을 갖춘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정식 개관됐다.
대전지점 건물은 1922년 건립돼 현재도 대전 구도심에 남아있으며, 등록문화재 제98호로 지정돼 있다. 8·15 광복 이후 대전체신청, 대전전신전화국으로 사용돼다 1984년 민간에 매각돼 상업용 건물로 쓰이면서 외관과 내부가 많이 변형됐으나 일제 강점기 대전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근대 건물로 가치가 인정돼 2004년 9월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목포지점 건물은 전라남도 기념물 174호로 지정됐으며 옛 일본인 거류지에 아직 남아있다. 붕괴 위험으로 1998년 해군의 철거 조치가 내려질 뻔 했으나, 각계의 반발과 1920년대 건물로는 유일하다는 데 착안해 일제 강점기를 잊지 않기 위해 사적지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보존됐다. 후에 목포근대역사관으로 개장하면서 근대사진전을 열고 있다. (두산백과 참조)
신용진 기자
자료제공·해설:영천 역사문화 박물관장 김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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