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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은인(恩人) 이종환 방송인의 죽음 재조명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0.09.02 19:05 수정 2020.09.02 19:05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선비는 자기를 알아 주는 지우자(知遇者)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2013년 5월 30일 오전 1시에 서거한 방송인 이종환DJ의 명복을 삼가 머리 숙여 빈다. 이종환DJ가 방송계에 입문한 것은 1964년이다. 이종환씨는 방송인으로서 소신이 분명했고, 로비가 통하지 않고 예술성이 뛰어난 천성적인 음악프로 진행자였다. 그가 진행했던 ‘별이 빛나는 밤에’ 프로는 밤하늘의 별 뿐 아니라, 애청하는 청소년들의 눈동자도 기대에 차 빛났다.
1988년 무렵,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길은 이 씨의 ‘별이 빛나는 밤에’ 프로에 시 한줄만 인용돼도 그 시집은 보나마나 불티나게 팔렸다. 그만큼 이종환 방송인은 시를 알아보는 혜안, 슬기로운 눈을 지녔다. 누구든지 시집을 내면 이종환 씨에게 제일 먼저 보냈다. 필자도 어렴풋이나마 귀동냥을 하여 이종환 씨의 위력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필자가 김시종 제9시집 ‘신(神)의 베레모’를 시문학사를 통해 펴 낸 것은 1988년 2월이었다.
그 해 4월의 어느 날 밤, 여고 1학년이던 맏딸 아이가 자지러지는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고요한 봄밤에 딸아이는 이종환씨가 진행하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고 있었다. 딸아이가 아비를 급히 부른 까닭이 곧바로 밝혀졌다. 필자의 9시집 ‘신(神)의 베레모’에 실린 시가 열네편이나 낭독되었는데, 그것도 한편을 두 번씩 연거푸 읽어 주는게 아닌가, 그날 밤 ‘별이 빛나는 밤에’는 필자의 시 소개로만 채워졌다.
필자가 이종환DJ의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그 분과의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시골 무지렁이였는데 집중적으로 필자의 시를 특집으로 다뤄주시다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격이요, 자다가 꿀떡이 생긴 경우이다.
이종환 방송인 덕분에 필자의 9시집 ‘신의 베레모’도 거의 베스트셀러 수준이 되어 거뜬히 출판비를 뽑아냈다.
이종환 씨는 그야말로 베스트셀러 제조기였다. 필자는 판박이 촌놈이 되어 이종환 은인에게 감사편지 한 장도 못 띄우고 고작 개인 시선집 ‘외팔이 춘희’를 한권 보내 드렸다. 그 시집에 실린 시 한편을 ‘별이 빛나는 밤에’ 프로에서 또 다시 낭독해 주셨다. 노래하는 가수와 시집을 낸 시인을 가려 옥(玉)과 돌(石)을 명백히 구별하시던 이종환 씨였다.
이종환은 1989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 한인방송 사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1992년 귀국해 MBC라디오 ‘이종환의 밤으로의 초대’로 방송에 복귀했다.
이후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시대’로 과거의 명성을 재확인했으며, 1996년에는 골든마우스상을 최초로 수상하기도 했다. 해박한 음악지식과 특유의 소탈한 입담으로 많은 청취자를 끌어 모으며 김광한, 김기덕과 함께 우리나라 3대 DJ로 불렸다. 그는 1970년대 음악감상실 ‘쉘부르’를 만들어 대중음악계에도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쉘부르에서 출발한 이른바 ‘이종환 사단’에는 쉐크린, 어니언스, 김세화, 남궁옥분, 양하영, 허참, 주병진 등이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방송활동을 했던 그는 한때 돌출행동과 음주방송 파문으로 마이크를 놓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2005년 4월 TBS FM ‘이종환의 마이웨이’로 다시 복귀한 그는 2012년 11월 건강상의 이유로 방송에서 하차했다. 1937년 탄생해 폐암으로 2013년 5월 30일 영면하셨으니 향년이 76세이셨다.
사람은 죽어도 그 사람의 행적은 길이 남는다. 천재 방송인이 발굴한 천재예술가는 오래 오래 그 빛을 발휘할 것이다. 작고한 이종환 선생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빌며, 끼쳐주신 은혜를 길이 잊지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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