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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골집 닭의 모습이 그립다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1.10 14:12 수정 2017.01.10 14:12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늘 닭 몇 마리가 뛰어 놀았다. 수탉은 화려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며 잠시도 나머지 닭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먹잇감이라도 하나 발견하면 특유의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듣고 암탉이 달려오면 먹이를 건네주었다. 별로 흔치 않은 먹잇감을 내어주는 모습은 여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그에 비해 암탉은 늘 다소곳했다. 그저 그런 수수한 모습에 드러낼 것 없는 몸매로 더러 수탉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알을 낳아 품는 모습은 아주 별다른 구경거리였다. 20여 일을 하루 몇 차례 먹이나 물을 먹기 위해 잠시 자리를 뜨는 것을 제외하고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어린 마음에 참을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참을성의 결과로 노랗고 예쁜 병아리가 태어났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을 줄탁동시라고 한다.부화 직전에 있는 병아리가 알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며 알 속에서 껍질을 쪼는 정점의 순간과, 이 소리를 듣고 새끼가 깨어나기를 바라는 어미의 쪼는 순간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아름답고 예쁜 병아리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병아리는 어미 닭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서 그 연약한 모습을 점차 키워간다. 외부의 온갖 위험 요소들에서 새끼를 지켜내는 어미 닭의 일상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이끌기도 하고, 바람이 불거나 솔개가 날아다니면 여러 마리의 병아리를 한 마리도 남김없이 품속에 감추기도 하면서 보듬고 살피는 일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우리나라 온 국민이 분노와 실망으로 몸부림치는 닭띠의 해 정유년 벽두에 옛 추억으로 남아있는 닭에 대한 기억은 아주 각별하다. 수탉의 나누고 지키는 모습과 암탉의 알뜰하게 보호하고 키워가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국가나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 좀 더 나눔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양극화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권한이 헌법에 있는 그대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엄중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조금이라고 있었다면, 그 숱한 국정농단이 발생하는 곳곳에서 한 번쯤은 경종을 울리고, 농단을 알리는 우려의 목소리가 울려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국리민복을 자처하는 공복들 중에 그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침묵하고 있었으니,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거기에다 실로 안타까운 것은 천만 이상의 국민이 춥고 비바람 부는 날씨에 촛불로 밤을 밝히고, 젊은 엄마 아빠들이 고사리 같은 어린 딸·아들의 손을 잡고나와 한 목소리고 외치고, 중고등학생들까지 수업을 마다하고 뛰쳐나와도 끄떡도 않고 그래도 할 말이 있다며 온갖 거짓을 말하며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은 실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오천만 국민을 먹이고 지켜가야 할 국가지도자들이 가난한 시골 초가집 마당에서 암탉과 병아리를 돌보던 한 쌍의 닭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현실은 서글프다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온 국민이 분노하고, 온 나라가 어렵고, 젊은이들의 절망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좀 더 나은 사람들과 좀 더 가진 사람들이 수탉과 암탉의 삶의 모습들을 많이 보여줬으면 한다.특히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경제여건에서 상공업을 경영하는 분들은 현상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일이겠지만 함께하는 근로자들이 계속해서 일할 수 있게 하고, 그들에게 아주 조금씩 만이라도 더 나누는 마음을 열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아울러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는 좀 더 정의롭고,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세상을 향해 보다 더 당당해야 하겠다는 다짐으로 한 해를 시작한다. 어릴 적 시골 집 마당에 뛰어놀던 닭의 모습이 못내 그리운 정유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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