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우리 인생과 만남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0.10.19 18:25 수정 2020.10.19 18:25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우리 인생에서 만남보다 더 소중한 인연은 없다. 어떤 부모를, 어떤 스승을,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가 인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하는 중요 변수가 된다.
갈릴리호수의 어부 베드로가 예수를 못 만났다면 오늘날 바티칸 언덕에 성베드로 성당이 있을리 없을 것이다. 소월 김정식 학생이 오산고보에서 은사 김억 시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국의 시문학사가 딴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너무 발달이 느린 것이 좋을리 없지만 지나치게 올된 것도 축복만은 아니다. 너무 일찍 겨울잠을 깬 개구리가 길가에 종이처럼 쫙 퍼진 모습을 한겨울이 지나면 볼 수가 있다.
필자는 6·25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피난도 못가고 두 달을 적 치하에서 살았는데, 이승복처럼 ‘공산당이 싫어요’ 했다면, 그 때 내 인생은 끝장났을 것이다. 좀 늦되었기에 일흔을 넘기고 지금까지 그런대로 보람되게 살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은 철없이 아무런 보람도 없이 헛되게 보냈는데, 가까스로 5학년 때 비로소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5학년 담임이신 이승희 선생님의 지도가 효험을 나타내서였다.
이승희 선생님은 산수숙제를 집중적으로 내셨다. 다음날 반드시 검사를 하셨고, 숙제를 안하면 매가 엉덩이를 매우 쳤다. 매앞에 장사는 없는 법이다. 처음에는 숙제를 안하다가 회초리 맛이 매워 숙제를 안빼먹고 하기로 결심했다. 다행이 급우 김연식이 산수 참고서를 가지고 있어서 연식이네 집에 가서 참고서를 베끼면 매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어렵다는 산수가 별개 아니었다. 산수문제 풀이를 베끼니까 산수의 원리를 저절로 깨치게 되어, 산수숙제는 재미가 솔솔 붙기 시작했다.
그 뿐이 아니라 5학년생인 내가 6학년 반에까지 산수 잘하는 소년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담임 이승희 선생님이 지도하시던 5학년 때 내게 문예부흥도 일어나게 되었다. 이 선생님은 가을소풍을 다녀 와서 기행문을 짓게 하였다. 난생 처음 쓴 글이라 글이 잘될리 없었고, 친구들에게 내가 지은 글을 이 선생님께서 읽어 주시면서 여러번 고개를 갸우뚱 하시는 걸로 봐서, 내 것은 내가 들어도 신통치 못했지만 친구들의 글솜씨에 감명을 받게 되었다. 기행문 작문 이 후부터 글 짓는 것은 재미난 것이라란 것을 새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 해 ‘소년세계’ 11월호를 구독한 것이 내 인생에 큰 전기를 맞게 했다.
소년세계 11월호 독자문단에 실린 대구 덕산국교 6학년 송구화 어린이의 동시 ‘어머니 생각’이 가슴에 바짝 다가왔다.
‘누나 따라 시골길 피난을 갈 때, 고향에 혼자 남은 어머니 생각’ 단 두줄이지만, 6·25 북새통에 피난가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나타났다.
나도 그랬다. 우리 집에서 남쪽으로 십여리 떨어진, 돌아가신 아버지의 외갓집이 있는 마을, 함창 이안천 건너 돗질로 피난을 가게 됐다. 우리 집에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남고, 큰 누나 손을 잡고 피난길에 올랐다.
1952년 소년세계 11월호에는 동시 어머니 생각 말고도 이주홍 선생님이 지은 소년소설 ‘아름다운 고향’도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때까지 미처 발견을 못했지만, 내 맘속에는 문학적인 끼가 철철 넘쳤던 것이다.
5학년 때 담임이신 이승희 선생님도 멋진 선생님이셨지만, 6학년 때 담임 김종태 선생님은 입시지도를 성공적으로 잘 해주셔서, 신설학교인 점촌국교가 지역학교 중 최고의 명문중학교(문경중) 합격률(1위)을 기록하게 됐다.
성공한 제자의 뒤에는, 빛나는 은사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교육계의 진리일 뿐 아니라, 인생의 진리인 것이다. 지금도 이승희 선생님은 생존해 계신다. 은사님의 여생이 더욱 복되소서.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