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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모든 일은 끝이 좋아야 한다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6.07.18 19:56 수정 2016.07.18 19:56

일진회는 일본을 모델로 한 문명개화노선과 국내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그들이 추구한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일본에 협력한 행위는 초기 일진회의 성격이나 내적인 계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매국단체로 평가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곳에 참여한 모두가 매국노의 길을 간 것은 아니다.일진회평의장(一進會評議長)을 역임한 전협(全協)과 같은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전협은 대동단(大同團) 결성의 핵심 당사자로 죽는 순간까지 조국독립에 매진한다.전협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수많은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이 후일 일제와 타협하고 변절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류의 수많은 성공신화들을 보면서 가졌던 의문도 거기에서 출발한다. 언론과 대중들이 성공의 아이콘이자 롤 모델로 받아들인 적잖은 사람들이 그 당대에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지 않았던가.적잖은 서양인들은 일본을 영국과 비교한다. 단지 섬나라여서일까. 영제국과 일본제국은 여러모로 닮았다.만세일계(萬世一系)를 표방하는 일본과 왕조의 교체가 있었던 영국이지만 두 나라는 현재도 왕실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일본과 달리 영국은 공화정을 경험한 아주 짧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그 시기는 바로 올리버 크롬웰에 의한 청교도 혁명이다.그 올리버 크롬웰의 대척점에 있던 존재가 찰스 1세다. 많은 사람들은 찰스 1세를 지칭해 시대착오적인 왕으로 말한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함몰돼 현실을 살피지 못한 무능한 군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만일 그렇다면 영국은 왜 다시 군주정으로 복귀한 것일까. 그리고 찰스 1세의 목을 친 올리버 크롬웰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찰스 1세가 재위하던 시절은 절대주의와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물리력이 배치되는 시대의 전환기였다.다시 말해 왕권의 절대적 권위는 최고를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뒷받침할 전문 관료조직과 경찰 및 상비군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왕에겐 조세권도 없었다. 세부적인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시대는 찰스 1세가 의회와 충돌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2년간 이어진 지루한 내전은 크롬웰이 주도한 신형군(New Model Army)의 승리로 끝난다. 이때 대부분의 온건파는 찰스 1세의 양보를 얻어내고 왕위를 유지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크롬웰은 이것을 거부한다.그는 찰스 1세를 대역죄로 기소한다. 이때 재판정에서 한 찰스 1세의 웅변에 언급된 내용이 소위 왕권신수설이다.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나의 통치권은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영국의 전통적인 법률에 의한 것이다. 신하들이 왕을 공격하는 행위는 신에 의해 주어진 통치권에 대한 그리고 신의 뜻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다.” 시대착오적인 궤변인가. 그가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을 들어보자.“신민이 더 많은 권리와 자유를 향유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정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신민이 정부에서 자신의 몫을 차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 말과 함께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인다.찰스 1세를 처형하고 1653년 호국경의 자리에 오른 크롬웰은 1659년 그가 죽는 순간까지 절대권력을 누린다. 그리고 죽음에 임해 자신의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준다.하지만 역사는 그가 죽은 다음 해 왕정복고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661년 그는 부관참시를 당한다. 그의 두개골이 산산이 부서져 먼지가 될 정도로 그의 시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군주제를 폐지한 크롬웰과 시대착오적인 찰스 1세. 영국은 왜 다시 군주정으로 복귀한 것일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 보여준 찰스 1세의 당당함과 대의를 잊고 사익을 추구한 크롬웰의 추한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되었다는 것이다. 역설이지만 크롬웰의 말년이 영국 군주정을 오늘까지 있게 한 것인지 모른다.모든 일은 결국 끝이 좋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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