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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오바마의 예의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1.22 14:41 수정 2017.01.22 14:41

남의 돈을 내 호주머니에 집어넣기란 참 어렵다. 상대방에게 좋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래도 낫다. 불쑥 헌금을 부탁하는 것은 아주 민망한 일이다. 아무리 훌륭한 대의를 내세워도 마찬가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달 20일부터 이런 곤혹스런 경험에서 해방된다. 더 이상 정치 헌금을 부탁하지 않아도 된다. 20년간 자신을 옥죄던 굴레에서 마침내 벗어난다.완전한 선거공영제를 시행하지 않는 한 정치인은 늘 돈에 쪼들린다. 인쇄물 작성, 광고 등을 위해 큰 돈을 들여야 한다. 미국 같은 선진국도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선거 운동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게 정치 자금 모금 활동이다. 정치인으로서 경력이 쌓이면 좀 괜찮다. 어느 정도 지명도를 확보한 데다 누구를 공략해야 할 지도 체득했기 때문이다. 거절을 당하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돈을 부탁할 정도로 낯도 두꺼워진다. 정치 신인은 다르다. 낯이 간지러워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전화하는 것을 주저한다. 두 세 차례나 전화했는데도 응대하지 않으면 아예 포기한다. 오바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화로 헌금을 부탁할 시간이 되면 온갖 핑계를 내세워 빠져나가려고 했다.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리거나 급하지도 않은 연설문 수정에 매달리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자 오바마도 이런 정치자금 모금 활동에 익숙해졌다. 잔뜩 뜸을 들이다가 돈 얘기를 꺼내는 일도 사라졌다. 속전속결 방식으로 바뀌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으면 즉시 용건을 얘기했다. 요령도 터득했다. 기부자를 자극하는 말은 가급적 피했다. 불필요한 논쟁은 자제했다. 헌금을 부탁하는 대신 기부자의 말을 경청했다. 정치 자금 기부자는 대부분 부유층이다. 이들은 정부의 정책을 꿰뚫고 있고, 자유주의 성향을 드러낸다. 이른바 '작은 정부'를 선호한다.반면 오바마의 정치 철학은 달랐다. 오바마는 정부의 역할은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보장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큰 혜택을 주는 정책에 반대했다. 오바마는 기부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민감한 주제는 피했다. 상당한 견해 차이가 예상되는 주제는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철학과 노선을 뚜렷이 가름할 수 있는 주제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입장을 밝혔다. 기부자가 “부시 행정부의 감세 혜택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오바마는 즉시 반박했다. 그 근거도 명확히 제시했다. 오바마는 자신의 지지 그룹에 대해서도 무조건 영합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노동계의 노동 및 환경 기준 강화 주장은 받아들였지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폐기 요구는 거부했다. 오바마는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명확히 제시했다. 그게 주권자에 대한 예의라고 믿었다. 보좌진은 일부 주제에 대한 뚜렷한 입장 제시는 표를 깎아먹는다고 반대했다. 오바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정치인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이 정치 불신, 나아가 민주주의 기반 훼손으로 이어진다고 우려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시민'이다. 지도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시민들의 참여와 지지가 없다면 모래성에 불과하다. 오바마가 고별연설을 통해 "변화는 미국 시민 여러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참여와 지지는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다. 중심축이 있어야 한다. 가치와 이념, 이해관계가 그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정치 지도자라면 자신의 이념 지향과 정책 방향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사실상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는 지지 기반 확대를 위해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로 규정했다. 전략적 모호함의 극치다. 이런 어정쩡한 입장은 외교에서는 훌륭한 선택일지 몰라도 정치에서는 비난의 대상이다.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주권자를 미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노점상도 바나나를 팔면서 원산지를 정확히 밝힌다. 정치 지도자의 입장은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시민의 참여와 지지도 가능해진다. 대통령 후보의 모호한 자세는 주권자를 우습게 본다는 방증이다. 심한 모욕이다. 시민들은 이미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숱한 모욕에 시달렸다. 더 이상의 모욕은 단호히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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