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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 ‘이팝나무 꽃’과 ‘신의 은총’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1.01.04 18:40 수정 2021.01.04 18:40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사람의 한살이(평생)가 물 흐르듯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2020년은 내겐 아쉬운 한 해였다. 내 삶(인생)의 기둥이 돼준 시 창작이 저조한 한 해였다. 어두운 사회분위기 탓에 나의 정서(서정)도 밝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산만한 긴 시(時)는 질색이고 단시(短時)를 사랑한다. 2020년에 마음에 드는 단시(短時)를 한 편도 못 지었다고, 내가 지난해 발표한 S일간신문칼럼에 밝혔는데, 뜻밖에도 지난해 시문학에 발표한 ‘이팝나무 꽃’이 일곱줄(7행)에 불과하지만 깔끔하고 내게 깊은 감동을 주는 매우 감명 깊은 사모곡(思母曲)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여섯 달 전에 26세로 돌아가셔서, 나는 아버지 얼굴조차 모른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으니까,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주 못살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사진 한 장도 남긴 적이 없이, 아버지의 죽음은 완전한 실종이요, 완벽한 증발이었다. 홀어머니는 내게 아버지 노릇도 겸해야 하셔서, 나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은 곱빼기로 클 수밖에 없다.
아버지도 죽고 없고, 땅 한 떼기 내 것이라곤 없던, 우리 집은 음력 4월, 5월만 보릿고개가 아니라, 1년 열두 달이 계속 보릿고개일 수밖에 없었다. 하얀 쌀밥이 그리울 때 6월초에 피는 이팝나무 꽃은 눈으로 먹는 이밥(쌀밥)으로, 쌀밥이 그리운 내게 대리만족을 주는 고마운 꽃이 아닐 수 없었다.
내게 어머니이자, 은인(恩人)이신 어머니가 내 곁을 영원히 떠나신 것은 2001년 겨울 1월 25일 오후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나서 꿈길로도 우리 집에 자주 오시지 않았다. 한 해 한번도 오시지 않을 때가 있었다. 요새 나에게 길일(吉日)은 어머니가 꿈길로 오신 날이었다. 이제는 꿈길로도 오시지 않아, 나는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 하얗게 핀 이팝나무 꽃에서 어머니를 발견하고 이팝나무 꽃은 내게 배고플 때 이밥(쌀밥) 이상으로 고마웠다.
지난해(5월 29일) 이른 아침에 뜰에 갓 핀 이팝나무 꽃을 보니, 어린 날 본 소복(素服)한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이팝나무 꽃’을 단숨에 지었지만 군두더기 없이 너무 깔끔하여, 돌아가신 어머니가 다시 살아오신 것 같아 너무 기쁘고, 반가웠다. ‘이팝나무 꽃’을 애독자 제현(諸賢)께 공개(公開)하여, 이 기쁨을 공유(共有)하고 싶다.

(시) 이팝나무 꽃 / 김시종

꿈길로도 안 오시는 어머님이 
이팝나무 꽃이 되어 소복(素服)입고 오셨네요.
오늘 아침.......

어머님이 정성들여 지으신 이팝나무꽃밥을
눈으로 양껏 배불리 먹고요,
올 한해도 어머님 생각하며 튼실하게 살겠어요.
어머님.......
(2020년 5월 29일 이른 아침)

‘이팝나무 꽃’에서 그리운 어머니를 만나고 나니, 80년 전(1941년) 26세로 요절한 얼굴도 뵌 적이 없는 아버지가 갑자기 떠올라, 아버지에 대하여 애틋한 시 ‘신의 은총’도 그냥 지나갈 수 없다.
(시) 신(神)의 은총 / 김시종

나에게 문물의 참 뜻을
깨우쳐 주시려고,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아버지를
압수해 가시다.
(2017.3.7.作)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1941년 7월 14일(양력)이요, 내가 유복자로 태어난 것은 1942년 1월 14일로 아버지를 뱃속에서 여읜지 꼭 반년(여섯 달)만이었다.
수중무일푼(手中無一分)으로, 빈농가문의 유복자(遺腹子)로 지금까지 ‘인생고(人生苦)의 폭탄’을 맞고 살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날의 유복자도 올해 80세의 노옹(老翁)이 됐다. 험한 생애도 내 팔자로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
모진 인생고(人生苦)를 긍정적으로 기쁘게 받아 들여, 흙수저를 금수저로 개조(改造)했다. 이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제 탓은 않고, 남의 탓만 일삼는 자다.
2021년은 내가 남을 배려하는 해가 꼭 되면, 코로나 대역질도 줄 똥을 싸고, 발바닥도 안 보이게 멀리 달아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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