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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때 반려동물이었을 소를 위하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1.01.07 18:24 수정 2021.01.07 18:24

윤 신 근 수의사·동물학박사
한국동물보호연구회장

최근 유튜브에 미국의 어린 소녀 브리애니의 앙증맞은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농장에서 키우는 송아지 ‘이지’와 거실에서 놀던 브리애니는 외출에서 돌아온 어머니에게 “이지를 거실에서 키우고 싶다”고 졸랐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어진 일 년 뒤 영상에서 어엿한 소로 성장한 이지가 문 열린 거실에 스스럼없이 들어와 물을 먹는 모습이 나왔다. ‘브리애니가 그날 이후에도 수시로 이지를 거실에 들였구나’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2021년은 ‘신축(辛丑)년’, 그러니까 소띠 해다.
신년부터 반려동물 칼럼을 연재하기로 하고 주제를 정하면서 필자는 ‘소도 반려동물이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봤다.
‘반려동물’(Companion Animal)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는 동물’을 뜻한다. 동물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애완동물’(Pet)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반려동물로는 개와 고양이가 대표적이다.
필자는 ‘가축’으로 남게 된 소도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상 반려동물로서 함께해왔다고 생각한다.
농경 생활을 하던 조선 백성에게 소는 몽골 유목민에게 있어 말의 존재 의미와 같았다. 닭, 돼지 등 단지 고기를 취하기 위해 기르던 ‘가축’과 전혀 다른 가치였다. 그들에게 소는 ‘재산 목록 1호’이자 농사의 든든한 ‘동지’였다. 비록 땅은 없어도 소만 있으면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개는 여름에 잡아먹어도 소는 10년, 20년 애지중지 키웠다. ‘반려자’가 가정을 함께 일구는 남편과 부인을 뜻한다면 전통적인 의미로 진정한 반려동물은 소였던 셈이다.
2009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감독 이충렬)는 현대의 이야기지만, 조선 백성에게 소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농부 ‘최 노인’이 30여 년 동고동락한 늙은 소와 이별을 준비하는 이야기는 잔잔한 감동을 전하며, 약 300만 관객을 모았다.
최 노인이 정성으로 보살핀 덕에 소는 평균 수명(15세)을 훨씬 넘겨 마흔 살까지 살며 베스트 프렌드이자 최고의 농기구, 유일한 자가용으로 보답했다.
지금보다 훨씬 혹독했을 그 시절 겨울이면 조선 백성들은 소가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 노심초사하면서 짚으로 외양간 방풍도 해주고, 옷가지로 소의 몸을 덮어줬다. 요즘 따뜻한 집안에서 살면서도 조금만 추워져도 옷을 입는 개가 밖에서 춥게 지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믈론 소고기를 먹는 문화는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1750~1805)가 쓴 책에 ‘조선에서는 하루에 소 500마리가 도살된다’는 구절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밀도살'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국시로 내세운 조선에서는 성인 남자 대여섯 명의 노동력을 대신하는 소를 함부로 잡는 것을 국법으로 엄히 금했다. ‘우금’(牛禁)은 농업 중심 경제 체제 나라의 근간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인 조처였다. 밀도살이 그만큼 성행했다는 것은 조선이 무너져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 소 위상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은 농기계에 의존하게 되고, 소고기를 즐기는 서구 식문화가 확산하면서 ‘고기소’로 사육되게 됐다. 덩치가 외국산 육우 못잖게 커지고, 근육이 마블링으로 대체되는 사이 반려동물 자리 역시 자연스럽게 개와 고양이에게 넘어가 버렸다.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이 일반화한 대한민국에서 소에게 그 타이틀이 주어지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조선 백성과 소와 같은 든든한 동반자 관계도 재현되기 힘들어 보인다.
필자가 한때 반려동물이었을 소를 위해 한마디 한다면 신축년에는 ‘동물 복지’가 소에게 더 많이 적용됐으면 한다. 이는 소뿐만 아니라 소고기를 즐기는 우리 건강을 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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