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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책혁신은 데이터 혁신에서 시작된다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1.03.22 18:08 수정 2021.03.22 18:08

이 채 정 부연구위원
국회미래연구원

‘도량형 통일’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배운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지만, 도량형 통일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꽤 자주, 중요한 대목마다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수탈하는 손쉬운 방법은 도량형을 속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관리들이 세금을 걷을 때 부피나 무게, 길이 등을 속여 징수하면 재물을 쉽게 착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투명하고 정확하게 거둬들인 세금으로 국가 공동체가 존속하는 것, 예나 지금이나 살기 좋은 나라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미국 국세청(IRS)은 2011년 대용량 데이터와 정보기술(IT)을 결합해 탈세 및 사기 범죄 방지 시스템을 구축했다. 국세청 행정자료를 바탕으로 납세자의 과거 행동 정보를 분석하여 사기성 행동을 검출한 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범죄자와 관련된 계좌, 주소, 전화번호, 납세자 간 연관성 등을 분석해 고의 세금 체납자 등을 찾아냈다. 그 결과, 연간 3,450억 달러(약 388조 원) 가량의 세금 누락과 불필요한 세금 환급을 줄였다고 한다.
오늘날, 과거의 도량형 통일을 대신하는 것은 방대한 양의 행정자료를 결합하여, 추정이 아닌 사실에 근거하여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집적된 행정 정보의 활용은 비단 조세정의 실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러 행정자료를 결합하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수집된 데이터가 생성되기 때문에, 각종 정책이 과연 목표했던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포착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로 인해 정부가 지급한 재난지원금이 멈춰버린 경제활동에 의해 우려되는 소득 양극화 완화에 기여했는가를 알아본다고 가정하자. 주민등록인구통계와 국세청 및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 개개인이 재난지원금을 받은 현금 및 신용 카드 이용 정보 등을 결합하면, 여태까지의 어떤 연구보다 가장 정확하게 정책 효과를 파악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누구에게 얼마를 지급해야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도출할 수도 있다.
지난주, ‘한국 행정데이터 연구자 네트워크(ADRNK)’가 발족했다. 행정데이터는 빅데이터(Big Data)이다. 빅데이터는 데이터의 양(Volume), 데이터의 생성 속도(Velocity), 데이터 형태의 다양성(Variety)을 뜻하는 3V를 특징으로 한다. 행정데이터는 전체 인구 개개인과 관련된 모든 행정 정보가 실시간으로 수집되어 수십 년 동안 집적된 것을 결합한 것으로, 국가 수준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빅데이터이다.
행정데이터 연구자 네트워크의 창립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나라도 증거기반 정책(evidence-based policy)을 설계·집행하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서이다. 북유럽은 이미 1960년대부터 행정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정책의 수립과 평가에 활용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인 미국은 2016년 증거기반정책수립위원회(Commission on Evidence-Based Policymaking; CEP)를 설립하여 행정데이터에 대한 접근성 확대, 개인정보 보호 강화, 증거 생성 및 활용 역량 확보를 위한 제도를 정비하고 실행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데이터 3법(개인정보 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 개정을 통한 중복규제 완화 추진과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산하 가명정보결합 종합지원시스템 개통 및 결합전문기관 지정 등 행정데이터 활용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부처별로 편재되어 있는 행정자료를 결합하고 다양한 변수를 확보하는 등 전 국민의 정보를 담고 있는 행정 빅데이터 정제 과정이 추진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 다양한 방법론을 활용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행정데이터 구축만큼이나 전 국민을 대상으로 수집된 엄청난 양의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한국 행정데이터 연구자 네트워크를 필두로, 통계청, 국세청, 건강보험공단, 고용보험공단, 국민연금공단 등 정부 측 실무진과 각계각층의 연구자들이 합심하여, 정확하고 신속하게 구축된 행정데이터를 분석하여 정책과정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하여 복잡다단한 정책 설계 및 집행 과정에 가려졌던 '진실의 문'을 열어젖혀야 한다.
내가 속한 국가 공동체는 나에게 적절한 수준의 세금을 매기고 있는지, 내게 필요한 급여 및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고 있는지, 혹시나 정책과정에서의 오류로 정부의 지원이 불필요한 사람에게 혜택이 집중되어 격차가 심해지고 있지는 않은지, 방만한 재정 투입으로 나의 세 부담이 지나치게 늘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등에 대해 국민은 알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이 알 권리에 기반한 정책이라야, 맹인모상(盲人摸象)에 의한 정책실패를 방지할 수 있다.
한국 행정데이터 연구자 네트워크 발족 취지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정책혁신은 데이터 혁신에서 시작된다. 증거기반 사회정책과 정책 효과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가능케 하는 행정데이터의 구축이 없이는, 정부 정책혁신은 기대하기 힘들다”
각계각층이 힘을 모아 정책혁신의 초석인 데이터 혁신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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