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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의관 강명길(康命吉) 대감 발굴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1.04.26 18:23 수정 2021.04.26 18:23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조선시대 최고천재는, 소과(생원·진사시험)와 대과(행정고등고시), 중시(重試)의 1차 2차 3차 시험을 합쳐 아홉차례(九度) 장원을 차지한 율곡 이이 선생이다. 율곡 선생은 28세에 대과(행정고등고시)에 장원급제(수석합격)하여, 까다로운 신고식도 면제받고 곧바로 정6품직인 호조(戶曹) 좌랑(佐郞)에 임용됐다. 요새 직급으로 치면, 초임(初任)에 재경부 과장이 된 셈이다.
조선시대 문과 대과와 무과에 급제하면, 과거합격 성적에 따라 차등 임용된다. 문과 대과 경우 갑과인 장원급제자(1등합격)는 종6품직에, 2등과 3등은 정7품직에, 을과(2등급) 합격자는 정8품직에, 병과(3등급)합격자는 정9품에 차등 임용된다. 과거급제 성적에 따라, 합격 동기생들도 현격한 격차가 났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중 아홉 차례(九度) 수석합격자는 율곡 이이선생 한분 밖에 없다. 이율곡 선생은 과거 성적만 월등한 게 아니라, 정책개발에도 조선시대 문관 중 당연 최고봉이다. 수미법(대동법)실시·십만양병설 주장들은 미래를 꿰뚫어 보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놀랍기만 하다. 율곡 선생은 문과대과 수석합격자로 28세에 호조좌랑에 임용됐지만, 20년 뒤 48세로 서거했다. 조선시대 평균수명은 24세(또는 41세)니, 48세면 결코 단명(短命)한 것은 아니지만, 임관되고 20년을 관리로 계속 복무한 게 아니라, 진퇴를 자유자재로 하여, 정1품(정승급)으로 승진하지는 못했다. 필자(나)는 조선시대 과거 성적 최고기록은 율곡 이이선생이 확고부동한 원맨쇼(?)지만, 조선 제2의 과거 성적 우수자는 누구일까 예의 주시(조사)했지만, 근자에야 그 답을 찾아냈다. 조선조 상주목 산양면 교동리에서 태어난, 강사상 좌의정의 자제인, 강신(동고대감)이다. 강신은 소과(진사시험)에 수석합격하고 문과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참찬(정2품)대감이 된다. 이율곡 선생과 다른 점은, 소과(진사시험)장원, 문과대과 장원은 이력이 같지만, 강신대감은 문관 임관 10년 후에 보는 중시(重試)를 거치지 않았다.
문과 대과 장원급제만 해도, 첫 벼슬이 종6품직으로, 중시(重試)응시의 필요성을 못 느낀 것 같다. 강신(동고대감)은 본인, 아버지(강사상좌상), 조부·증조부, 아들(강홍립)까지 5대(代)에 걸쳐 문과 대과에 급제하여 중앙의 요직을 거친 조선조(시대) 최대의 명문가(名門家)인데, 강사상 좌상은 현재의 문경시 산양면 교동리 출신임에도, 대부분의 문경시민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조선시대 의관 중 의술(인술)이 빼어나고 인간성이 좋고, 최고(정1품)로 영달한 분은, 광해군 때 동의보감을 저술 편찬한 어의 허준 대감으로, 왕실과 서민의 병을 적극 치료하여, 의관의 한계(정3품 통훈대부)를 극복하고, 정1품(정승급)까지 승진하여 전무후무한 신기록을 세웠다. 허준어의 대감의 다음(종1품)이 되는 의관은 누구일까 장고했지만, 오리무중이었는데, 2018년 9월 9일 KBS1TV ‘진품명품’ 시간을 경청하다가 뜻밖에 정답을 얻게 되어, 그 날 점심밥이 더욱 꿀맛이었다.
조선조 어의로 허준대감 다음의 제2인자는 의관 강명길(康命吉) 대감이시다. (1737년~1801년) 조선후기의 의관으로서, 본관은 순천·1768년(영조44년) 식년의과에 급제하고, 내의원 의관이 되어 왕세손(정조) 때부터 총애를 받아 의약에 대한 자문에 응했으며, 1794년(정조18년)에 내의원수의(수석 의관)이 됐다. 1799년 왕명을 받아 ‘제중신편’ 8권을 편찬했고, 그 밖에 ‘통현집’을 냈다. 수의로 봉직하면서, 양주목사, 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의관으로 숭록대부(종1품)에 올랐다. 1801년 정조의 병을 잘못 치료했다하여, 64세로 죽임을 당했다. 어의 강명길 대감도 의관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지고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의관 강명길 대감이 편찬한 ‘제중신편’은 동의보감에 버금가는 쾌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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