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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고려 공민왕과 왕의산(王衣山) 왕의목(王衣木)

오재영 기자 입력 2022.03.16 06:40 수정 2022.03.16 11:28

이만유 전 문경 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왕의목-
“고려 공민왕이 용포를 걸어두었던 나무가 살아있다”, “왕의산(王衣山)느티나무 고목,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야”. 10여 년 전에 필자가 쓴 글의 제목이다.

고향에서 지방 공무원으로 근무 당시 마을 어른들에게서 듣고 반신반의했던 고려 공민왕이 몽진 길에 용포(龍袍)를 걸어두었다는 나무의 실체를 퇴직 후 문화관광해설사와 향토사 연구 활동을 하면서 현지 확인하고 세상에 알리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건의한 문건이다.

이 산이 왕의산(王衣山)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 경북도 복주(안동)로 피난을 가면서 문경을 지나게 되었다. 이곳 경북 문경 산양면 위만2리 상위마을 뒷산에서 잠시 쉬어가게 되었는데, 쉬면서 용포를 걸어두었다는 나무가 있기 때문에 산의 이름이 임금 왕(王) 자에 옷 의(衣)자를 써 왕의산이 된 것이라고 한다. 또 이곳을 ‘옷걸골’이라고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661년 전, 다시 말해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11월에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피난길(몽진)에 올라 파주-이천-음성-충주-문경을 거쳐 12월에 복주(福州, 경북 안동)에 도착했다. 홍건적은 공민왕 즉위 무렵에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구성된 종교적 농민 반란군이다.

이듬해인 1362년 1월 공민왕의 특명을 받은 총병관 정세운은 이방실·안우·김득배 등과 함께 군대를 정비, 강화하여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 난을 평정하였다. 공민왕은 안동에 도착한 지 두 달여 만인 1362년 2월에 환도 길에 올랐다. 상경 때에는 조령을 넘지 않고 상주를 거쳐 청주-죽주-파주로 해서 개경으로 돌아갔다.

공민왕과 왕의산(王衣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역사와 전설을 품고 있는 우리 지역 중요한 문화자산인 이 왕의목(王衣木)을 잘 관리, 보존하기 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행정기관에 다시 촉구하는 의미로 지난번에 쓴 글을 재차 보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왕의산은 문경 산양면·산북면과 예천군 용궁면을 경계로 그리 높지 않은 해발 338.6m의 산이다. 이 산 정상부에는 영남사람들이 한양을 오가면서 지나는 문고개 라는 고개가 있고 고갯마루 바로 아래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 한그루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지금은 검게 변한 속을 드러낸 채 고목이 되어 서 있다.

지난해(2020년) 문경 YMCA 주관하는 관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개 탐방 프로그램에 해설자로 참여하며 현지에 가서 살펴보니 나무는 개미들의 집이 되고 쇠약해져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았다. 하루빨리 점검하고 보존대책을 세우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천연기념물은 학술 및 관상적 가치가 높아 그 보호와 보존을 법률로 지정하는 것인데 동물의 종과 서식지, 식물의 개체·종 및 자생지, 지질 및 광물 등으로 우리나라는 약 400여 점이 지정되어 있고 나무로는 노거수, 성황림, 호안림, 방풍림, 어부림, 보해림(補害林), 역사림 등이 주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문경 왕의산 왕의목(王衣木)은 수령은 물론 나무나 숲과 관련된 특별한 고사나 전설 등이 전해지는 역사림 범주에 들어가며 천연기념물로서 충분한 자격과 지정요건을 갖추었다.

문경에는 고려 공민왕과 관련된 역사 및 전설,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공민왕이 피난 중에 난이 빨리 평정되지 않자 인근을 순행하던 중 문경에서 홍건적의 난을 물리쳤다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하여 경사 경(慶)자에 들을 문(聞)자를 써 문경(聞慶)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유래와 문경의 진산 주흘산에 있는 혜국사(惠國寺)와 어류동(御留洞), 전좌문(殿座門), 산북면 가좌리 등이 모두 공민왕과 관련된 지명과 전설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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