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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문경의 King Road 2

오재영 기자 입력 2022.06.13 06:28 수정 2022.06.13 09:11

향토사 연구원 이만유




4. 후백제 왕 견훤의 출생, 성장 설화 및 전투로
(아차마을, 금하굴, 말바위, 근품산성)
▲ 아차마을 ▲ 숭위전(견훤왕 사당)
견훤이 왕이 되기 전 문경 궁기에 살 때 말바위에서 용마(龍馬)를 얻었다. 견훤은 하늘이 장차 내 왕업을 돕기 위해 이 용마를 보냈다고 생각하며 말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 하고 적지산 산꼭대기로 화살을 쏘고 말을 달려 그곳에 이르렀으나 화살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화가 난 견훤이 “이게 무슨 용마냐?”하며 칼로 말의 목을 베는 순간, “피웅∼”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나무에 꽂혔다. 말이 화살보다 빨랐다. 견훤은 “아차!” 소리를 지르며 성급한 것에 후회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 되었다. 이러한 연유(緣由)로 견훤이 출생한 마을을 ‘아차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라는 용마전설이 있다.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아차마을에 한 부유한 가정에 규중처녀가 살았는데 밤이면 처녀 방에 이목이 수려한 초립동이 나타나서 처녀와 정담을 나누다가 동침까지 하고는 새벽이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또다시 밤이면 나타나고 하기를 무릇 수개월이나 되었다. 마침내 처녀는 잉태하여 배가 부르게 되니 하는 수 없이 부모에게 사실을 실토하였고 처녀의 말을 들은 부모는 깜짝 놀라 딸에게 말하기를 “그 사나이가 오거든 평상시와 같이 잠을 자다가 몰래 옷자락에 바늘로 실을 꿰매어라”라고 일러놓았다. 다음 날 새벽에 실오리를 따라서 계속 찾아가 보니 굴(금하굴金霞窟)로 들어간 지라 따라가 보니 커다란 지렁이가 몸에 실을 칭칭 감고 있었다. 그 후 그 사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얼마 후 처녀는 옥동자를 출산하였으니 그가 후백제 왕 견훤이다라는 견훤(甄萱)의 출생 설화가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 50 열전 견훤 조에 견훤이 태어나 어린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 그때 아이를 나무 수풀 밑에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시골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라는 기록도 있다.

▲ 근품산 ▲ 근품산성-성황당으로 변신
근품산성(近品山城)은 문경시 산양면 현리 뒷산인 근품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산성으로 토석 혼축, 편축식, 테뫼식으로 축성된 길이 1,600m 산성이다. 927년(태조 10년) 정월 왕건이 용주(龍州-예천 용궁)를, 3월에는 근품성(近品城)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견훤은 9월에 근품성을 쳐서 불살랐다. 이어 고울부(현 경북 영천)을 거쳐 신라의 도성으로 진격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였다.
★견훤의 출생, 성장 설화 및 전투로 루터(관광코스) : 금화굴과 숭위전⇨말바위⇨농바우⇨천마산⇨견훤산성⇨근품산성

5. 공민왕의 몽진로
▲ 혜국사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복주(현 경북 안동)로 몽진(蒙塵)하러 가게 되었고 난이 쉽게 평정되지 않자 인근 지역을 순행하던 중 문경 주흘산 법흥사(法興寺)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그런 연유로 경사스럽고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인 문경(聞慶)이라 지명이 생겼으며, 절 이름도 나라가 은혜를 입은 절이라 해서 법흥사에서 혜국사(惠國寺)로 변경되었다. 또 공민왕이 산양면 위만리에 있는 산길을 지나다가 나뭇가지에 왕의 옷(용포龍袍)을 걸어두었다 하여 그 산의 이름이 왕의산( 王衣山)이라 불렀다는 전설도 남아있다.
★ 공민왕 몽진로 루터(관광코스) : 하늘재⇨혜국사⇨대궐터⇨마전령(馬轉嶺)⇨근품산성⇨왕의산

6. 경순왕의 구국 기원로
▲ 봉암사 극락전 ▲ 하늘재(계립령) 정상
문경 봉암사 극락전(보물 제1574호)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데 후삼국 시대 때 신라 경순왕이 피난시 구국을 기원한 원당으로 사용했다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가람고(伽藍考)'와 '교남지(嶠南誌)'권 36 문경군 조(1937년)에 절의 북쪽에 2층 극락전이 있고, 신라 경순왕 때 창건되어 조선 세조의 어필이 봉안되어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목탑형식의 건물로서는 현재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팔상전(捌相殿)과 함께 국내에서 단 두 채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문화 자산이다. 임진왜란 때 봉암사가 불탔는데 그 당시 다른 전각은 다 타버렸는데 극락전만 불타지 않아 왜병들이 장작개비에 불을 붙여 몇 차례나 지붕에 던져도 불이 붙지 않아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신비감을 주는 건물이 봉암사 극락전이다.
★경순왕 구국 기원로 루터(관광코스) : 당교⇨금화굴⇨희양산성⇨봉암사

7. 경순왕의 귀부로(歸附路)와 마의태자의 망국 한탄로
신라의 국력이 패퇴하여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에서 출발하여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향하여 귀부(歸附: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여 신라를 고려에 바쳤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시 경순왕의 행렬은 30리에 달할 정도로 길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행렬이 움직이기 위해선 신라의 교통로 중 제일 큰길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립령을 통과하는 길이다. 그럼 경순왕의 이동 경로를 추정해 보면 경주-영천-구미(의성)-상주(예천)-문경-충주-이천-서울-개성으로 연결되며 문경 내의 이동로는 상주에서 당교를 거쳐 토끼비리를 지나 계립령을 넘어 충주로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는 신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홀로 풀을 베어 먹으며 생을 마쳤다는 비운의 왕자인데 월악산자락에 자리한 미륵사 대원사지는 마의태자에 의해 세워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렇다면 마의태자 역시 경순왕이 갔던 길을 따라가다가 개골산으로 갔다고 추정되는데 그 경로는 경주-영천-구미-상주-문경-충주-양평-홍천-인제-금강산이 된다고 보며 문경 구간의 경로는 경순왕이 간 길과 같다고 본다.

마의태자는 나라가 망하였으니 죄인이 되고 상주가 된다는 뜻으로 마의를 걸치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문경의 토끼비리와 하늘재를 넘어갔다고 보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하였으랴?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 하랴.”
★경순왕 귀부로 루터(관광코스) : 당교⇨유곡역지⇨토끼비리⇨요성⇨관음⇨하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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