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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불암리(佛岩里) 전설의 고향

오재영 기자 입력 2022.11.21 11:17 수정 2022.11.21 11:45

이만유 문경향토사 연구자






불암리는 경북 문경 산양면(山陽面) 면 소재지로 낙동강 상류인 금천(錦川)을 사이에 두고 예천 용궁면(龍宮面)과 접해 있다. 원래는 마을 북쪽에 있는 금양교(錦陽橋)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냇물 양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쯤 큰 홍수로 모든 가옥과 전답이 피해를 본 후에 금천 서쪽으로만 새롭게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불암리는 전국에서 시골 면 단위 마을로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점이 있다. 마을의 구획과 도로가 도시와 같이 반듯반듯하게 바둑판같이 십자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당시 일제가 신도시, 다시 말해 경북 북부지역의 행정 및 경제 거점도시를 여기에다 조성하고자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현재도 34번 국도가 동서로, 59번 국도가 남북으로 마을을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다.

이곳에서 갓난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필자가 이 마을에 대해서 그동안 듣거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어린 시절 밤이면 아래 펼쳐질 이야기 속 현장에는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와 추억이 서린 곳들이 사라지고 훼손되어 오히려 그 시절, 그 모습, 그 풍경들이 그립기도 하다.

불암리 마을 유래는 마을 서쪽 산의 바위에 봉황새가 깃들었다고 하는 전설로 인해서 봉암(鳳岩)이라 하였다. 그 후 이 바위 모양이 부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불암(佛岩)이라 하였으며, 예전에는 소원성취를 바라거나 특히 기자(祈子) 신앙으로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던 기도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문경시에서 가장 일찍 일반가정에 전기가 공급되어 남보다 먼저 문명의 혜택을 누렸다. 조선 시대 때도 저잣거리(시장)가 형성되었고 구한말부터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큰 2일, 7일 오일장이 열려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으며 물류 또한 풍부해서 경제 활동이 왕성했던 곳이었다. 그러던 곳이 어느 시점부터 활력을 잃고 쇠퇴의 길을 가게 되었다. 물론 산업화, 도시화, 교통의 발달 등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불암리가 쇠퇴하게 된 풍수지리 이야기가 있다.

불암리 마을은 동쪽과 서쪽에 야트막한 산이 둘러 있는데 이 두 산은 암수 두 마리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 명당이라고 한다. 그냥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여물을 배불리 먹고 편안하고 느긋하게 되새김질하며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형상을 한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쯤 동쪽 산,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바위를 금천(錦川) 제방 공사를 하면서 필요한 석재를 얻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함으로써 그만 소가 기력을 잃고 힘을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발전은커녕 쇠퇴하게 되었고 한다. 그리고 서쪽 산에는 소의 머리 부분에 묘를 쓰게 되어 이 또한 기(氣)를 읽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쪽 산 아래로 흐르는 금천에 지금은 도로를 내면서 없어졌지만, ‘개쏘’라는 큰 소(沼)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기이하게도 자정이 되면 빨랫방망이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 오밤중에 웬 여자가 빨래할까? 궁금들 했었나 감히 무서워 아무도 가 보지 못했는데 어느 날 한 용감한 청년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찾아가니 긴 머리에 뒤태가 아름다운 여인이 방망이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지라 “여보시오. 이 밤 중에 무슨 일이요?”하고 말을 붙였지만 대답하지 않다가 세 번째 물음에 방망이질을 멈추고 뒤를 확 돌아보는데 “으악!” 여인이 피를 머금은 붉은 입에 오색 무지갯빛 얼굴을 하고 노려보는지라 그만 청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져 죽게 되었다. 

사람들을 궁금하게 한 뒤 유인하여 혼을 빼간 것이라고 하며 그 뒤에도 몇 사람이 그곳에서 더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에 우리는 벌벌 떨며 밤이 되면 무서워 밖을 나가지 못하였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예전에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억울한 일을 당한 처녀가 이곳에서 자살한 후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 집안에서 원혼을 달래려고 큰 굿을 하고 난 뒤로부터는 원한을 풀고 하늘나라로 갔는지 다시는 빨랫방망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하나 이야기는 역시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마을 북쪽에 수백 년 된 아름드리 왕버들이 10여 그루 서 있는 ‘묵은 천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비가 오는 밤에는 ‘귀신불’ 또는 ‘도깨비불’이라고 해서 공기 속에 바람 따라 새파란 불이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자정이 되면 상엿소리가 들리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고 하였다. 이 또한 밤에는 물론이고 한낮에도 그곳에 가지 못하는 무서운 곳이었다. 아마도 오래된 죽은 고목이나 동물 뼈가 있어 거기에서 나오는 인불, 즉 인화(燐火)라고 해서 인(燐)의 작용에 의한 불인데 그 시절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지막 이야기로 마을 남쪽 끝자락에‘황새도랑’이라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현대식 화장장이 없을 때 금천과 합류하는 지점의 모래사장에 장작을 쌓고 불을 붙여 화장하던 노천 화장터였고, 6.25 전쟁 당시에는 반동분자 처형장이었으며 산양 장날 사람들을 불러 모아 공개 처형한 일도 있었다는데 그 시신이나 주인 없는 시체를 갔다가 버리는 곳이었다. 언제나 산그늘이 져서 음산하고 으스스한 곳으로 이곳 역시 밤이면 도깨비불이 떠다니므로 무서워 가지 않는 곳이었다. 

이렇게 우리 지역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살상과 참화가 있었으며 이런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모두 한마음으로 국력을 키우고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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