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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힘든 오늘, 아버지 다산을 생각한다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6.13 11:19 수정 2017.06.13 11:19

오랫동안 가정의 중심이었던 아버지들이 밀려나고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요즘이다.부계사회에서 모계사회로의 이동으로 가정에서 아버지의 위치가 갈수록 작아져가는 이 시대에 만난 책 ‘아버지 다산’은 우리들에게 아버지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다시금 돌이켜 보게 한다. 다산(茶山)정약용의 이름이야 모르는 이 없겠으나, 그의 시 몇 편을 스치듯 읽은 외에는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로만 알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겐 이 책과의 만남은 정말 소중한 부자간의 뭉글한 감동을 내게 선사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 그의 일생 가운데 가장 비참했던 순간은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1801년11월 전라도 강진에 유배된 직후 였을 것이다.동네 사람들은 나라에서 금한 사학(邪學) 죄인이라 하여 다산과 말도 섞지 않았다.거처할 것이 없어 동문 밖 주막 노파의 호의로 겨우 방 한 칸을 빌릴 수 있었지만, 귀양 온지 1년쯤 지났을때 벼락같은 전갈이 날아들었다.세 돌을 채 넘기지 않은 막내아들 농(農)이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게 나은데도 살아있고 너는 죽는 것보다 사는게 나은데도 죽었다”고 한탄할 만큼 처참한 생활이었다. 다산이 첫 유배생활 4년을 보낸 곳은 동천여사(東泉旅舍) 사의재(四宜재)였다. 읍내 군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사의재는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이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다 급전직하로 추락한 다산은 이곳에서 스스로를 추스렸다. ‘생각은 담백하게 외모는 장중하게 말은 과묵하게 동작은 무겁게’등 네 가지 원칙으로 스스로를 제어하겠다며 방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초라하고 불편한 주막집 객사였을 뿐이다. 다산은 훗날 “여름이면 모기와 벼룩에게 뜯겨 밤잠을 이룰 수 없었던 곳”이라고 술회했다. 두 번째 거처인 고성사(高聲寺) 보은산방(寶恩山房)에 스물둘 장성한 큰아들 학연이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 바로 이때였다.다산은 아들과 어린제자 황상을 데리고 보은산방에서 주역 공부를 하며 한겨울을 지났다. 둘째 형 정약전이 귀양가 있던 흑산도 쪽을 바라보며 정상에서 시를 지었다. ‘저 먼 곳 바라본들 무슨 도움 있으랴/괴로운 맘 쓰린 속을 남들은 모르리라’ 정약전은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1816년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났다.열다섯살인 제자 황상이 ‘저 같이 머리도 나쁘고, 앞뒤가 막혔고 분별력 없는 사람이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다산은 말했다. “항상 문제는 제가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는 구멍이 뚫릴게다.”스승의 말씀을 들은 소년은 일흔 넘은 노인이 돼서도 이 말씀을 새겨 자나깨나 잊지 않고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산은 6남3녀를 낳은 다산(多産)한 아버지였으나 그중 6명의 자녀가 요절하는 아픔을 겪었다.돌을 미처 넘기지 못하고 죽은 자식도 있었으며 더런은 두 살에, 또 두엇은 예닐곱에 아비의 곁을 떠나서니 그 허망함을 어찌말로 다했을까. 이 책은 18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착박한 유배지에서 편지로써 자식을 혹독하게 원격 교육한 강인한 아버지 다산, 스물아홉 꽃 같은 나이에 떠나보넨 며느리를 둔 시아버지 다산, 형인 정약전이 처형된 후 정성을 다해 돌보았던 두명의 조카마저도 17세와 20세에 떠나보내야 했던 숙부(叔父) 다산의 절절한 사랑과 슬픔의 한(恨)을 그가 남긴 편지와 시구(詩句)들을 통해 조명하고 있다.유배되기 이전부터 다산의 집은 가난하여 끼니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니 그가 떠난 후의 삶이야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터이다.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터이다.아내와 자식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다산이 남긴 편지와 시들은 어느 한 편, 가슴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중 유독 마음 아픈 한구절을 소개하면, ‘손님이 와 내 문을 두드리는데/자세히 보니 바로 내 아들이었네/수염이 더부룩이 자랐는데/ 이목을 보니 그래도 알 만하였네/ 너를 그리워 한 지 사 오년에/꿈에 보면 언제나 아름다웠네/장부가 갑자기 앞에서 절을 하니/어색하고도 정이 가지 않아/안부 형편은 감히 붇지도 못하고/우물쭈물 시간을 끌었다네(하략)’ 강진에 유배된 지 오년 만에 큰아들 학연을 만났을 때의 소회를 토로한 시이다.여비가 없어 아버지를 찾지 못했던 아들은 수확이 끝난 마늘을 팔아 나귀 한 마리를 얻어 아버지에게 온다. 입은 옷이 황토범벅인데, 아들이 허리나 다치지 않았는지 걱정하면서도 다산은 아들이 무안해 할까봐 묻지 못한 것은 또 있었다. 아들은 다산에게 “수확한 마늘이 먹는 배만큼 컸다”고 자랑했지만 농사 초짜인 아들의 말이 곧이 들렸을리 없었다.아들의 말에서 오히려 가난의 크기를 읽었지만 얼마나 힘든지 차마 묻지 못한 아버지의 심정이 시공을 넘어 절절히 느껴져 온다.몽매에도 아들을 그리워하였으나 막상 만나서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아버지. 학문의 길에나 삶에나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었지만 자식에게는 유독 약했던 다산, 제대로 자식들을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에 시달리는 아버지 다산, 시달리고 후들리면서도 어느 한 곳 기댈 데 없는 요즘 우리네 아버지와 너무나 닮은 그의 모습이 가여린 내 마음 깊은 곳을 아리게 하는 오늘이다. 당신에게 정말 ‘아버지 다산’을 꼭 한번 권하고 싶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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