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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선시대 역사의 아쉬운 장면 세컷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9.11 16:02 수정 2017.09.11 16:02

지난날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아쉬운 대목이 한 두 장면이 아니다. 너무 애틋하여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아쉬운 역사의 대목은 다음 기회로 돌리고, 우선 조선시대 역사의 아쉬운 대목을 살펴보련다.아! 단종(1441-1457). 단종의 비극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됐다. 어머니가 갖난 아기때 죽어, 어머니의 사랑도 못 받고 자랐다. 병약한 아버지 문종마저 임금이 된지 3년 만에 죽으니, 보호할 부모(왕·왕비)가 한 분도 없게 되자 야심가인 숙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내치고 왕이 되었다.단종을 철옹성 같이 지켜주던 충신 김종서 정승, 황보인 정승을 수양대군의 모사 한명회, 권람이 도륙하고, 수양대군이 눈독 들였던 보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영월 청령포로 유배했다.사육신과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거사를 빌미로 하여 어린 조카를 무참하게 살해했다.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한 영월 호장 엄흥도 공은 처음엔 공조참판으로 추증됐다가 뒷날 영의정으로 추증됐다.단종은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의 아들로 조부인 박학다재(博學多才)한 호학(好學)의 영주(英主) 세종대왕을 닮아 매우 총명했다. 수양대군이 3년만 조카 단종을 참고 보살펴 주었다면, 단종은 조부인 세종대왕 이상의 현군(賢君)이 되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많다. 수양대군의 성급한 왕위찬탈을 못마땅해 하는 지식인들이 많다. 유교정치이념인 덕치(德治)를 수양대군이 깨뜨려, 세종조의 태평성대가 뒤에도 조선 땅에 없었다. 개인이나 왕자나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부모의 지극한 보살핌이 있어야 사람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부모를 잘 만나고 못 만나고는 운명의 힘이 막강한 것이다.조선후기의 아쉬운 역사장면은 광해군(1575-1641)의 폐출이다. 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선조의 서자다. 선조는 왕비 박씨가 왕자생산을 못하자, 공빈 김씨를 취하여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광해군은 비록 서자였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질도 착한데다 공부(학문)를 잘하여, 미래의 왕으로써 부족함이 없었지만, 다만 서자(庶子)가 되어 애로가 많았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분조(分朝)를 이끌며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마련하는 등 믿음직하게 눈부신 활약을 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선조 승하 후 왕위를 어렵사리 얻게 되었다. 광해군 즉위에 공이 큰 대북(大北)의 정인홍이 집권하여 과감한 정치를 하게 됐다. 왕위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한 8세의 어린동생 영창대군을 강변질우 역모에 연좌됐다고 하여 교동현에 귀양 보내 살해하고, 광해군보다 9살 아래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했다.실권했던 서인들이 이를 트집 잡아 김류·이귀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추대했다. 광해군은 강화도를 거쳐 다시 제주목으로 유배되고, 귀양살이 18년만에 66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그러나 조선의 임금 중 세 번째로 장수를 했다.연산군은 폐위 한달 만에 적소에서 30세로 요절했지만, 광해군은 비록 폐주가 됐어도 운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무너뜨리고 과격한 친명정책으로 급선회한 인조는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의 양대 전란을 겪게 됐다.광해군은 재위(在位) 15년 동안 토지개간, 성지수리, 동의보감간행, 조선왕조실록 재간행, 국방강화 등 혁혁한 업적을 쌓았지만, 폐모살제(廢母殺弟)로 성리학자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광해군의 굶주린 백성 구제는 다른 왕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가슴을 지닌 임금이었음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황폐한 광해군묘를 보면, 광해군의 치적을 재평가하여 왕릉수준으로 보수해 현주(賢主) 광해군의 억울함을 하루 속히 풀어주어야 할 것이다.잘못된 지난날의 역사평가는 마땅히 오늘날 재평가, 해석하는 것이 산 역사의 교훈이 아니겠는가,오늘의 마지막 화제는 정조(1752-1800)의 서거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노론의 방해를 간신히 넘어, 조부 영조의 뒤를 잇게 되었다. 정조는 조선 초기의 세종대왕과 비견할 만큼 총명하고 박학했다. 조선 왕으로선 유일하게 개인전집인 ‘홍재전서’를 펴냈다.국방강화를 위해, 손수 제작한 기중기로 수언화성 성곽을 세웠고, 화성행차를 위해 만든 한강배다리도 대단한 볼거리였다. 왕립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즉위년인 1776년에 세워, 정책개발과 개혁의 싱크탱크로 활용했다.규장각 검서(檢書)는 종9품의 말단직이지만, 임금과 머리를 맞대는 요직이었다.검서관 4인에는 당시 관직에 오를 수 없었던 서얼출신들을 특채했다.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박재가 등이 바로 그들이다.정조가 제위 24년 만에 승하하니 조선의 근대화도 물 건너가게 되어, 후일 일본의 밥이 되었다. 현명한 정치가(왕)의 건강은 국가의 운명과 직결된다. 정조가 몇 념만 더 개혁정치를 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 역사는 더욱 밝은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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