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선산의 인재와 지형적 특수성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11.20 13:40 수정 2017.11.20 13:40

조선조 숙종 때의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 ‘조선인재 반은 영남에서 나오고, 영남 인재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실려 있다. 이렇게 선산지역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 데서 유래된 말이다.선산은 지형적 특수성으로 인재가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일까?역사적으로 고려말부터 수많은 인재가 선산에서 배출됐으나 언제, 어떤 인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 했는지 대부분 잘 모른다.안타까운 일이다.이에 구미지역의 전설과 함께 대표적인 인물과 풍수지리학적 특수성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본다.고려 말 우왕때부터 조선조 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와 이문리 일대의 한마을에서 무려 14명의 장원, 부장원, 문과 급제자들이 배출돼 자연스럽게 장원방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 현재도 이 일대가 서당마을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선비들이 이 마을을 출발해 과거장으로 갈때 넘어갔던 뒷산 봉우리를 장원봉이라 부르고 있다. 세종 원년 병과에서 장원한 김숙자, 세종 20년 무오방 을과에서 장원한 하위지, 세조 4년 무인방 병과에서 급제한 김종직 등이다. 이보다 앞선 고려 우왕 14년 무진방 병과에서 급제한 김치에서부터, 영조 14년 장원한 박춘보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선비들이 탄생, 역사에 남을 인물들이다. 특히 길재-김숙자-김종직-하위지로 이어지는 학문적 맥은 조선 성리학의 기둥역할을 했다. 이들 가운데 빼어난 학문 뿐 아니라 고려 패망 후 충절의 상징이 된 길재, 단종 복위를 꽤하다 실패해 처형당한 사육신 하위지 등은 후손들에게 크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한편 지형적으로도 선산은 앞에는 금오산, 뒤에는 비봉산, 그리고 넓은 앞들로는 감천이 흐르고 있어 풍수지리적으로도 특이하다.선산읍의 정수리에 위치한 비봉산은 백두대간 낙동정맥에서 뻗어내린 소백산 줄기가 상주의 갑장산을 거쳐 동으로 내달려와 형성된 산이다. 봉우리가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바로 동쪽의 교리 뒷산과 서쪽의 노상리 뒷산이 날개에 해당된다. 봉황의 목이 앞으로 불쑥 도드라져서 입으로 옛 군청 청사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 한다. 옛 사람들은 봉황이 날아가면 상서로운 기운이 흩어진다고 생각해 어떻게 하든지 날아가지 못하게 붙들어두려 했음을 인근의 지명으로 알 수 있다. 감천 너머 물목마을 뒤의 황산(皇山)은 수컷인 봉이 암컷인 황을 만나 아기자기하게 잘 살라는 뜻이다. 고아읍에 소재한 망장산(網障山)은 봉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그물을 쳐놓는다는 뜻으로 그 아래에 망장이란 마을이 있다. 선산 서쪽의 죽장(竹杖)리는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사는 봉이 먹을 것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선산읍 동남쪽에는 온갖 꽃들과 새들이 있어 봉황이 즐겁게 놀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화조(花鳥)리가 있다. 남쪽의 무래(舞來)리는 딴 곳의 봉황이 와서 노는 곳이라 한다. 상상 속의 봉황을 실제의 것으로 수용하고 풍수화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봉황의 기운이 서려있는 선산에서 인재가 많이 탄생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진다.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봉황은 날아가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다. 장원방이 서당마을 주변에는 지금도 선산초등학교와 선산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예전에는 서당에서 공부를 하고 과거를 통해 진출했으나 지금은 이들 학교를 졸업한 지역의 인재들이 사회 각처에 진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고 있다. 전설이지만 봉황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이야기, 실제로 인재들이 구름처럼 태어나는 선산의 이야기는 후손들에게 배움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서당에서 공부해 과거에 응시, 장원급제 한 후 그들이 스스로의 직분을 다한 선비로서의 참모습을 후세들이 본 받아야 할 것이다. 훌륭한 조상들의 모습이야말로 첨단 문명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훈이 된다.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