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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10.23 19:18 수정 2018.10.23 19:18

김 시 종 시인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김 시 종 시인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1967년경 대구에는 정강자라는 전위미술화가가 있었다. 제목은 죽은 나무를 세워놓고, 그 옆에서 꾀(옷)를 활딱 벗고, ‘작품工’하는 식으로 했다. 그 당시 즉석에서 방년의 아가씨가 자신의 나체를 공개하는 것은 경천동지할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필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갓 당선된 애송이 시인이었다. 필자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설치예술가 정강자씨가 저음 가수 남○○씨의 친동생이란 사실이었다.
예술계, 예술가의 사회에는 ‘일생일작(一生一作)’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필자는 그림 그리기에는 손방이다. 제대로 된 그림을 한 번도 그려 본 적이 없지만, 감자판화를 1966년에 찍은 적이 있는데, 5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멀쩡하게 잘 보관하고 있다.
세상에는 가끔 예외도 있어 살맛이 나는 게 아닐까?
그 뿐 아니다. 난생 처음 읽는 동시(1952년)를 몇 십년간 찾다가 기어코 찾아낸 ‘어머니 생각’을 작곡하여, 소발에 쥐 잡는 격이지만 작곡도 한편 남기는 행운을 잡았다.
필자보다 15년 아래인 사촌동생이 2011년 9월 17일 55세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호서남초등학교 동기회(44회)에서 한라산 등반을 했는데, 동기들의 선발대로 의욕을 보였지만, 성널오름 부근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등반에 참여한 의사팀들의 신속한 심폐소생시술이 있었지만 죽음의 신을 이겨내지 못했다.
사촌동생의 조난 사고는 TV방송에도 보도됐지만, 김모씨(55세)가 필자의 종제인 것은 상상도 못했다. 이틀 뒤 9월 19일 초량동 인창병원 장례원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사촌동생은 성격이 온순하고 아주 착했다. 친동생이 없는 필자에게는 사촌동생이 가장 가까운 동생이다.
종제 규태는 필자의 중3시절 가을에 아들을 바라던 차에 태어나 축복받은 탄생이었다. 사촌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 점촌을 떠나 그때까지 부산에서 장가가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왔다. 부인도 키가 크고 얼굴도 예쁘고 이해심도 깊고 부부간의 금슬도 잉꼬부부의 대명사였다. 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둘 다 명석한 두뇌를 타고나, 맏이는 연세대에, 작은 아들은 포스텍 공대에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조기 입학했다. 최근에는 부산에 63평형 맨션 아파트를 구입하고 사는 재미를 만끽하게 될 직전에 뜻밖의 사고사를 하게 돼 온 가족의 비통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잘 생기고 늠름한 두 조카에게 “하늘이 너희들을 큰 사람이 되라고 아버지를 일찍 부르신 것 같다. 분발하여 천국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며 울음을 참고 억지로 말끝을 마무리했다.
갑작스런 사촌 동생의 종말 앞에 필자도 어리둥절했다. 물에 빠져도,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죽음은 신비스럽다. 숙부님이 돌아가신 것이 2007년 9월 17일 오전 9시, 과도한 운동 끝에 심장마비로 하세하셨는데, 사촌동생도 2011년 9월 17일 오전 9시, 등반의 과로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아깝게 삶을 마감했다.
필자는 조문을 다녀온 뒤, 종제유가족에게 다독이는 전화를 하지 못했다. 필자 마음에도 충격이 다 정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문하던 날 영안실에서 필자의 갈증을 풀어주던 음료수 매실캔을 고이 지니고 집에 돌아왔다. 매실 깡통 위에 제주도 방문 기념으로 사온 돌하르방을 올려놓았다.
어찌된 일인가? 필자의 눈에는 성판악(성널오름)을 오르는 사촌동생이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살다보니 필자도 설치미술을 한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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