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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사상기생 정칠성 선각자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10.30 18:14 수정 2018.10.30 18:14

김 지 욱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김 지 욱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앵무 염농산과 복명 김울산보다 한 세대 아래로 금죽(錦竹)이라는 기생명을 가진 정칠성(1897~1958)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그녀 역시 앵무만큼이나 자아의식이 뚜렷한 여인이었다.
정칠성 선각자는 1897년 대구부 출신으로 초년에는 기녀였다.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는 적으나, 빈한한 가정에서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생들이 일반적으로 12~13세에 업을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일곱 살에 기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준다. 기생이 된 후 각종 기예를 익혔고, 18살이 되던 해에는 남도출신들이 모여 있던 경성부 한남권번 소속 기녀가 되었다.
평소 책 읽기를 좋아했던 정칠성 선각자는 책에 빠져 춤, 무용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지만 남중잡가, 가야금산조, 병창, 입창, 좌창, 정재 12종무 등의 기예 뿐만 아니라, 시화, 바둑, 장기 등 잡기에도 능했다.
22세가 되던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정칠성 선각자의 인생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발표할 때 그곳에서 일하던 몇 명의 기생들도 동참했는데 정칠성 선각자도 그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이때의 일을 두고 정칠성 선각자는 “기미년 만세운동을 계기로 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기생에서 주의자로 변신하게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기생에서 항일투사로 변신한 정칠성 선각자는 화류계를 떠났다. 1920년대부터 당대의 대표적 신여성인 김일엽, 나혜석, 김명순 등과 함께 ‘신여자’ 필진으로 활동하면서 ‘사상기생’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계속해서 신여성에 대한 공부를 갈망하던 중 192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미국으로 유학할 생각으로 도쿄영어강습소에서 영어를 수학하였다.
비록 비용 문제로 귀국하게 되었지만 일본의 유학 경험은 그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즉 신문명을 체험하는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듬해 귀국하여 고향인 대구에서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한 정칠성 선각자는 그해 10월 서복주, 김귀조, 조영수 등과 함께 대구여자청년회 창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 당시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여성단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작문에도 능하여 글과 논설을 지어 발표하였는데, 여성의 계몽, 교육의 장려, 사회 부조리의 개선, 위생 청결론 등을 주장하여 이른바 '사상기생'이라는 이름값을 했다. 이후 그는 조선의 역사 관련 서적, 사회주의 사상과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을 구해서 독서하였다.
1924년 5월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사회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25년 3월 도쿄에서 무산계급 및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유학생들과 함께 도쿄의 조선여성단체인 삼월회를 조직하였고, 1925년 경북 도단위 사상단체인 사합동맹 결성에도 참여하여,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신사회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여성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1926년 1월 삼월회 간부 자격으로 《조선일보》에 '신여성이란 무엇?'이라는 칼럼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정칠성 선각자는 “강렬한 자립정신, 강력한 계급의식을 지닌 여자가 모든 불합리한 환경을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진정한 여자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경제력을 얻으려면 여자 역시 취직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여성의 자유를 넘어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가정과 결혼에서 독립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해방이라는 것이었다. “단순한 자유를 넘어서 남성과 가정, 가족으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한 여성의 권리를 찾는 것은 요원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1927년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결성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이 된 후로는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의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연을 하였다. 1928년 5월에는 신간회 황해도 황주지회가 주최한 '사회문제대강연회'에서 그는 “우리 조선여자들은 남자들의 완롱물이요, 남자의 위안물이며, 남자들의 일개의 생식기계에 지나지 않는 노예였다.”며 여성의 억압을 통렬히 지적하였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으로, 1930년에는 소위 ‘조선공산당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는 등 평생 10여 차례나 일경에 체포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 좌익계 여성단체인 조선부녀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부위원장,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상임위원 겸 조직부 차장으로 활약하다가 월북했다. 이후 북한에서 공산당 고위 간부로 활동했지만 1958년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당하였다.
이렇듯 정칠성 선각자는 일제라는 식민지 억압구조와 조선의 봉건적 구습의 테두리 속에서 얽매여 있던 여성들의 의식부터 깨우고자 노력한 선구자였다. 그녀는 “가정과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열등한 인간취급을 받던 여성들이여. 잠에서 깨어나라”고 강하게 호소하였던 것이다.
평생을 여성해방운동을 위해서 투신한 정칠성 선각자가 화류계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여성으로 새로이 태어날 수 있었던 힘도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서 해방을 갈망했던 몸부림에서 나왔으리라. 작금의 현실에 이런 분이 더욱 더 절실히 요구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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