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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추억여행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10.31 19:10 수정 2018.10.31 19:10

김시종 시인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김시종 시인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사람이 자기인생을 살아오면서, 기억 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몇 세부터 일까?
내 경우는 만 3세 때 해방되던 날 - 1945년 8월 15일이다. 나는 정확하게 1942년 1월 14일(양력)에 태어났으니, 해방되던 날에 만 3세 7개월이다.
그 날 나는 작은 누나(당시 만 7세)등에 업혀 집에서 가까운 야산으로 피신을 했다. 일본사람들이 조선 사람을 학살한다는 루머(유언비어)가 마을에 괴질처럼 퍼졌기 때문이다. 섶밭티라는 야산에 키가 하늘을 찌르는 전 나무가 꽤 울창하게 서 있었다. 야산을 개간하여 녹두를 심었는데 녹두나무 키가 커서 누나나 나 같은 어린애가 숨기엔 아주 좋았다. 그날 (1945년 8월 15일)은 우리 동네(점촌 중신기)엔 다행히 일본인들의 난동은 없었다. 그 날 작은 누나는 녹두밭에서 이웃에 사는 동희누나와 공기를 하며 놀았다.
둘째 기억은 해방 이듬해 초봄(1946년 3월)에 할아버지가 78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78세는 지금으로 치면 90대 후반 쯤 된다고 볼 수 있고, 우리 마을에서 그때로 봐선 제일 오래 사셨다. 할아버지 장례를 마친 뒤 이웃집(바로 앞집) 정휘구 어른도 우리 할아버지를 아주 동네어르신으로 극진히 모셨다. 만 네 살이 된 나는 너무 어려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 할 줄도 몰랐다. 장례를 치르는데 적극 참여하신 동네 어른들이 침울한 분위기를 날려 보내기 위해 어린 장손인 나에게 재주를 시험했다. 평소 삼촌이 즐겨 부르던 유행가책을 가지고 나에게 부르라고 했다. 나는 평소 삼촌이 부르던 가요집 가사를 문자(첫자)만 떼면, 모조리 술술 다 외워 바로 앞집 정휘구 어르신(중신기 마을최고 부자요 최고지성인)도 자기집에 5남매를 키웠지만, 이런 신동(神童)은 처음 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생전에 조부님은 어린 손자에게 아들(우리 아버지)이 요절(26세 사망)하여 못한 사랑을 손자사랑으로 대신하신 듯 했다. 어려서 장난이 심했던 나(손자)는 늙으신 할아버지를 부담스럽게 하는 장난을 많이 했지만 아이는 활발히 움직여야지 잠잠(냠냠)해서는 안 된다며 적극 옹호를 해 주셨다.
세 번째 기억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1948년 8월 15일)된 해에 나는 의무교육 1기생으로 점촌 흥덕리에 있는 호서남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때가 1948년 9월 3일이니 내 나이 만 6세 7개월이었다. 어릴 때 평소 병약했던 나는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한 달이나 앓아누워 입학하던 날은 어머니 등에 업혀 3.5km를 가야 했다. 중신기(우리 동네)이웃에 살던 노순경 사모님이 호서남국교 앞으로 이사를 하셔서 입학식을 마치고 나서 노랑 설탕을 넣고 끓인 흰죽(쌀죽)을 맛있게 먹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아이가 없던 노순경 사모님은 우리 남매를 평소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셨다. 내가 자란 뒤, 옛날 은혜를 생각하여 노순경 사모님을 찾아뵈려 했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사셨다면 100세를 넘기셨겠지만, 이승에 계시던 저 세상에 계시던 고운 마음을 지니셔서 밝은 나날이시리라.
네 번째 기억은 8세에 겪은 6.25북새통이다. 1951년 1월 4일, 1.4후퇴 때 우리집은 큰 어려움이 닥쳤다. 두 번 피난(1.4후퇴 피난)을 가야 하는데 할머니가 중병(죽을병)에 걸리셨고, 다 피난을 가고 한 개 밖에 없던 병원도 문을 닫았다. 중공군의 불법개입으로 다 이긴 싸움이 도로목으로 전선이 엉망이 되고 국군 2사단이 후퇴하여 점촌(문경군)에 주둔했는데, 우리집에도 방 하나가 징발되어 소대본부가 되었다. 소대본부에는 윤상사 사모님(여중 중퇴·전선철새)과 남자 군인들 몇이 살았다. 윤상사 사모님 김영자(가명)아줌마는 열아홉밖에 안 되었는데, 전쟁이 나기 전에는 서울의 명문여중을 다닌 꿈 많은 유망주였다. 김영자 사모님은 우리집에 계실 동안 하루도 안 빼먹고 소피와 선지를 한 바가지씩 나눠 주셔서, 할머니병환이 많이 호전되었다.
전세의 호전으로 2사단이 진격하게 되어, 윤상사 사모님이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셨다. ‘학생(나) 건강하고, 공부 잘 하세요.’란 덕담을 남기시고 나에게 최초의 그리움이 되셨다. 국군이 진격하고 나서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평소 늘 가꾸시던 밭에서 가까운 양지바른 곳에 산소를 모셨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젊은 남자. 젊은 여자. 가축(소·돼지·개)이라는 명언(名言)이 있다. 진정한 평화는 무장해제로 되는 게 아니라, 완벽한 군비와 굳은 안보 정신에 있다.            (2018. 10. 26. 17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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