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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 땅의 스타 신성일, 하늘의 별이 되다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11.05 17:42 수정 2018.11.05 17:42

김 시 종 시인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어제(11월 4일) 자고 일어나 TV아침 뉴스를 보니 이땅의 영화계 수퍼맨 신성일 대스타께서 긴잠(永眠)에 드셨단다.
필자는 1961년, 1962년에 한국의 일류 남녀 가수와 코메디언은 녹음방송(라디오)현장에서 거의 실물(실제 인물)을 다 보다시피 하여, 나름대로 대중연예계에 달인이 되었다.
그러나 영화배우는 실제 인물을 많이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배우중 배우요, 이 땅의 주역(주연)배우 신성일 선생을 고향땅인 문경시 점촌동 문경시민 문화예술관에서 뵐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문경시청에서 시민과 시청공무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해 연(年)10회 정도, 전국적인 명사(名士)를 초청하여 이름 있는 초청강사가 심어주는 유익한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문경시청 주최 새문경아카데미에 2012년 11월 9일에 신성일 대스타가 초청되어 ‘청춘은 맨발이다’가 주제였다. 그 날 문화회관 1,2층은 개관(開?)하고 나서 최고의 성황을 이루었다. 신성일은 연기의 거인(巨人)일 뿐 아니라, 화술도 능란하여 두 시간 동안 청중을 꼼작 못하게 사로잡았다.
문경시의 청중(시민)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세기의 역사적인 영화 주인공을 마음 놓고 볼 수 있으니 그 자체로도 큰 감동이었다. 우렁찬 박수로 두 시간의 성공적인 강좌가 마무리됐지만, 신성일 대스타의 싸인(Signature)을 받을 사람은, 폐회 후 별실로 오시라고 안내해줬다. 오후 다섯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싸인을 희망하는 사람이 40명이나 되었다. 필자(나)도 중진시인으로 문단의 거물(?)이었지만, 자존심을 잠깐 내려놓고 스타 신성일 선생과 정담을 나누며, 싸인지(紙) 한 장도 챙겼다.
신성일 선생은 두뇌가 명석하고 시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신성일 선생이 준 싸인지(紙)를 신주 모시듯 잘 모셔왔는데, 너무 잘 갈무리하여 아무리 찾아봐도 못찾겠다 꾀꼬리다. 그 날 같이 싸인을 받은 사람을 찾아내어 싸인지를 복사할 작정이다.
고 신성일(본명 강신영)은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났고, 명문고인 경북중·고를 졸업한 학구파였다. 고교졸업하고 신 필름 신인배우 오디션 현장을 찾았다. 지원자 2540명이 몰렸는데 뛰어난 외모(얼굴)에 감동한 신상옥 감독은 즉석에서 영화배우로 발탁했다. 이렇게 하여 1960~1970년대 스크린을 흔들었던 원조 꽃미남 스타가 탄생했다.
신성일은 1964년 한국영화배우 중 최초의 여학사인 엄앵란(본명 엄인기)과 세기적인 결혼식(축하객 4천명)을 올렸는데, 신성일의 염문으로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지만 엄앵란의 대범하고 슬기로운 인내로 이혼하지 않고 백년해로 할 수 있었다.
신성일은 정치에 입문하여 국회의원 뱃지도 달았고, 교도소에서 수인번호도 다는 영욕을 겪었다. 신성일 대스타는 살아서 524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507편에 남자 주연 배우가 되었다. 신성일은 임종하는 자리에서 현처 엄앵란여사(82세)에게 “수고했고 고맙다. 미안하다”는 짧고도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유언마저도 명인(名人)답다.
11월 6일 영화인협회장으로 신성일대스타가 영원한 안식처(산소)로 떠나게 됐다. 언제쯤 신성일 대 스타 같은 큰별(배우)이 다시 이 땅에 태어나려나 헛 고대를 해본다.                        

(2018. 11. 5. 12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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