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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여성 광복군의 맏언니, 오광심 항일무장투쟁가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11.06 19:08 수정 2018.11.06 19:08

김 지 욱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광복군이 우리 국군의 뿌리라고 한다면 대한민국 여군의 뿌리는 여성 광복군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중경에서 광복군 창설식이 열릴 당시 광복군 총사령부 대원 40명 중에 오광심, 지복영, 조순옥, 김정숙이란 4명의 여성대원이 있었는데, 이 중 활동력과 지도력이 가장 뛰어나 ‘여성 광복군의 맏언니’로 불린 분이 바로 오광심(1910~1976) 지사다. 여성 대원 가운데 가장 연장자 축에 들기도 했던 오광심 지사는 일찍부터 민족교육에 앞장섰고 1930년대 이후 청년공작대 등 항일무장조직에서 활동했으며, 훗날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부인이 되어 남편과 함께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오광심 지사는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에서 1910년 3월 출생하여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갔다. 정의부가 설립한 화흥중학 부설 사범과에서 1929년 졸업할 때까지 민족의식을 키웠고, 이듬해 한족회 소속의 배달학교와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의 동명중학 부설 여자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대일 항전이 본격화될 무렵인 1930년 그는 배달학교 교사이면서도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였고, 항일투쟁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독립운동 전선에 직접 뛰어들고자 1931년 교사를 그만두고는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 활동과 지하연락 공작을 맡았다.
이후 조선혁명군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서 주로 연락을 담당하는 등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참모장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김학규와 결혼하여 평생을 아내이자 동지로서 동고동락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만주 지역 독립군의 여건이 점차 악화되자, 혁명군 사령부는 임시정부에 원조를 요청해야만 했다. 이때 오광심 지사는 대표로 선발된 남편 김학규와 함께 안동에서 중국 남경까지 멀고도 험한 길을 가야 했다.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김학규는 농부 또는 행상으로, 오광심 지사는 중국인으로 변장을 하기도 하였다.
훗날 오광심 지사는 당시 심경을 시 ‘님 찾아가는 길’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 님 찾아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님 맞을 그날을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그리고 중국 남경에서 통일전선 구축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남편 김학규가 200여 쪽짜리 보고서를 만들자 이를 통째로 외우고는 만주의 조선혁명당에 성공적으로 전달하니 본부의 간부 모두가 탄복을 하였다고 한다. 즉 남편이 작성한 보고서 전문을 한 자도 빠짐없이 외워 구술 보고를 함으로써 일경에 발각될 위험을 차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활약으로 1935년 7월 남경에서 5당 통일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부녀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중국 관내지역의 상황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1939년 2월 광서성 유주에서는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가 조직되었고 이러한 청년공작대에서 지사는 항일 투쟁의 내용을 담은 합창, 연극 및 벽보 제작 등의 활동을 통해 항일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훗날 한국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1940년 9월 중경에서 지복영, 조순옥, 김정숙 등과 함께 여군으로 한국광복군 창립식에 참여했으며, 11월에 서안에서 본부가 설치되자 총사령부에 소속되어 복무했다. 서안 총사령부의 시급한 과제는 대원 확보를 위한 모병활동이었고 이를 위해 광복군 기관지 「광복」 제작에 참여하였는데, 이 창간호에서 오광심 지사는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을 통해 여성들의 광복군 참여를 촉구했다.
“광복군은 무릇 3천만의 광복군이며, 3천만 가운데 1천5백만의 여성도 포함되어 있는 줄로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요,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오며,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않으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면 절름발이가 되며,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 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그 뒤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와 함께 광복군 선전활동을 계속 담당하여,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모병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새로 합류한 대원관리와 교육도 맡았는데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로 대원들로부터 경의와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광복 후에는 중국 상해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주호판사처 처장 김학규를 도와 교포의 보호와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하였고, 이후 심양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48년 4월 조국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조국을 위해 한 평생 헌신한 그의 열정과 용기에 대한 보답은 다 어디를 가고, 여느 독립운동가처럼 1976년 운명하기까지 가난에 시달리는 고달픈 삶이 내내 이어졌다고 한다. 아, 오광심 지사여, 어쩌면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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