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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코마네치가 불가능은 없다고 했다고?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11.15 18:56 수정 2018.11.15 18:56

이 성 주
코리아메디케어 대표

1976년 7월 18일 캐나다 몬트리올 실내체육관. 153㎝, 39㎏의 나디아 코마네치가 이단평행봉에서 예술을 선보이고 완벽히 착지했습니다.
그러나 전광판의 점수는 10점 만점에 ‘1.00점.’ 코마네치도 일순간 당황했지만, 곧 이 점수가 10점임을 알고 얼굴을 활짝 폈습니다. 올림픽 체조에서 9.95 이상의 점수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에, 시계를 제작한 오메가 사가 세 자리밖에 만들지 않아 생긴 일이었습니다.
코마네치는 이 대회에서 여섯 차례 10점 만점을 더 기록하고 3관왕에 오릅니다. 한국계 소련 대표 넬리 킴(김경숙)도 두 차례 10점을 기록하면서 3개의 금메달을 땄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코마네치에 집중됐지요. 그 전 뮌헨올림픽을 수놓았던 ‘민스크의 참새’ 올가 코르부트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코마네치에 가려졌습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코마네치를 가리켜 “사람의 몸을 빌려서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표현했지요?
1961년 오늘은 루마니아의 오네슈티에서 나디아 코마네치가 태어난 날입니다. 코마네치는 여섯 살 때 체조 코치 벨라 카롤리의 눈에 띄어 체조를 시작합니다. 아홉 살 때 전국대회에 첫 출전했지만 평균대에서 세 번이나 연거푸 떨어지며 실패를 맛봤습니다.
그러나 코마네치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보약 삼아 더욱 더 열심히 연습합니다. 이름 ‘나디아’는 ‘희망’이라는 뜻인데, 그 희망을 땀으로 이룬 것이지요.
한때 카롤리 코치가  혹사에 가깝게 훈련을 시켰다고 논란이 일었지만, 코마네치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스스로 원해서 열심히 노력했고, 스승을 고마워한다고 밝혔습니다.
코마네치는 1989년 스승 카롤리의 뒤를 이어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11월의 혹한에 콘스탄틴 패니라는 남성의 도움을 받아 며칠 동안 얼어붙은 벌판을 가로질러 헝가리로 탈출했습니다. 헝가리 국경수비대원에 따르면 목숨을 걸고 탈출한 요정은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고 합니다.
코마네치는 오스트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향합니다. 미국에서 패니에게 상업적으로 이용당하다가, 미국의 올림픽 체조 3관왕 버트 코너를 만나면서 고난의 삶에서 벗어납니다. 둘은 루마니아에서 결혼을 하고 사업을 하면서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칩니다.
코마네치는 2004년 아디다스의 광고를 통해서 다시 세계에 알려집니다. 코마네치의 올림픽 만점 경기와 러시아계 미국 체조선수 나스티아 리우킨의 경기 모습을 절묘하게 합성한 광고의 메시지는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t is nothing)”이었지요?
그러나 코마네치는 불가능을 극복할 수는 있지만, 쉽지 않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뜻 깊다고.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곱 살짜리 꼬마가 내게 와서 ‘하늘의 별’ 같은 최고의 체조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말할 것 같을까요? ‘말도 안 된다’는 대답 따위는 결코 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것이 가능은 합니다.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래, 넌 할 수 있어, 하지만 무척 어려운 일이란다. 내가 도와줄게. 그러려고 여기 있는 거란다. 난 평균대에서 손으로 땅 짚고 뒤로 재주넘기를 잘못했을 때, 속상할 때, 두려울 때 어떻게 되는지 잘 알거든. 나도 그런 적이 있으니까.’ 그리고 부모에게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하늘의 별’은 너무 높고 먼 곳에 있어 무척 고독하다고.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이가 별을 찾아 여행을 떠날 때엔 부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아이가 떨어지면 잡아주고, 예기치 못한 결과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모든 아이가 나디아처럼 운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이야기도 덧붙일 겁니다. 큰 부상을 당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가끔은 나 스스로도 놀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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