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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공정 사회의 의미와 지향점은?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11.25 19:10 수정 2018.11.25 19:10

김 윤 조 법학박사
서울사이버 대학교 법무행정학과 교수

‘공정사회’와 결과의 균등(均等)
우리 사회가 공정한가에 대한 의문이 곳곳에서 노정(露呈)되고 있음은 물론 특히 ‘갑(甲)질’의 여러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고도성장 후 삶의 질이 다소간 나아짐에 따라 우리 사회가 공정(公正)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의 ‘공정성(公正性) 담론(談論)’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분야에서 계속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공정사회”
이명박 대통령이 던진 '공정한 사회'란 화두(話頭)가 등장한 것은 2010년 8월 15일 기념 경축사였다. 당시 이 대통령은 “사회 모든 영역에서 ‘공정한 사회’라는 원칙이 확고히 준수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하면서 위장전입과 각종 비리 혐의로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른 김태호 전 총리 내정자,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이재훈 지식경제부장관 등을 낙마시켰다(조선일보, 2010.9.14., 인터넷 참조).
청와대에서 열린 중소기업 대표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누구나 균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 공정사회의 기본”이라며 공정사회가 어떤 것이며 그 방향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있는 사람이 더 내고 적은 사람은 적게 내는, 모든 분야에서 기회를 균등하게 주자는 것”이라며 자신의 ‘공정사회’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의 ‘공정사회’에 대한 각자의 해석도 다양했다. '칸트'적인 해석으로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처럼 공정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생각한다는 해석이 있다. 다시 말해 ‘공정’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반드시 행해야 할 목표라는 것이다. 또 ‘공정’이 다양하게 해석되면 오히려 혼란을 가져 올 수 있으므로 공정의 기준은 ‘법치주의’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존 롤스'의 자유주의적 평등을 '공정'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롤스는 자연적·사회적 행운에 의해 얻은 개인의 재능이나 능력을 사회 공동자산으로 보고 불쌍한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인트(Saint) 하버드’라 불리는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는 1971년, 출간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모두 충족시키는 대안을 정립했다. 자유주의적이든 평등주의적이든 “공정한 절차에 의해 합의된 것이면 곧 ‘정의’가 된다”는 절차적 정의론을 내세웠다. 롤스의 ‘정의론’은 자유주의에 입각하고 있지만 “최소 수혜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견해에서 평등주의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다시 말해 ‘정의론’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와 개인의 능력에 따른 차등을 인정하는 자유주의를 절충한 이론이다.

공정사회의 의미와 지향점
공정사회는 어떠한 사회를 말하는가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필요해 보인다. ‘공정(公正, equilty)’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공평하고 올바름이다. 즉 어떤 사안을 평가하고 판단함에 있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경우를 동일한 비율로 다루는 것이다.
대기업 총수, 교수 등 사회지도층의 ‘갑(甲)질’, 권력자들의 내로남불식의 불공정, 나아가 임금문제, 사회보장제도에 이르기까지 공정이 문제되고 있다.
요즘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최저 임금’, ‘국민연금’, ‘노령연금’ 등과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지지적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공정’을 어떻게 어느 정도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기본정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오랜 논란이 되었던 ‘무상급식’ 논란이 그것이다. 모든 학생에게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선별적으로 필요한 학생들에게만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의 상이함이 그것이다. 아래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정은 오른쪽의 그림을 지칭함이 일반적이다. 키가 큰 사람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상자를 키가 작은 사람에게 주어서 세 아이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을 말한다. 한편 왼쪽의 그림은 모든 아이에게 같은 상자를 주는 것인데 이를 ‘공평(公平)’이라 한다. 
존 롤스는 공평(Equality)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주어지는 것을 말하며 공정(Equity)은 justness, fairness, impartiality(不偏不黨) 등을 통합하는 개념이며 인종이나 성별, 장애 등을 고려하여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즉 공평(Equality)이 양적인 개념이고, Equity(공정)은 질적인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Equity(공정)이 Justice(정의)의 개념이라고 하였다.
정의의 개념을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사회안전망 확립과 같은 교육, 의료, 주거, 보육, 노후, 기초소득의 보장 등과 관련한 정책이 달라짐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대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복지 등에서의 정의의 개념적 경향은 ‘공정’이 아닌가 한다.
마이클 샌들은 “공정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를 의미하며 “제한된 자원 속에서 자유와 경쟁의 단순한 공리만을 추구하는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배려하는 분배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고 했다. 따라서 정치는 “공공선(公共善)을 추구”해야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공공선은 분배의 정의와 공정한 경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임을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의 ‘공정’한 경제정책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정책의 3대 축이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이며,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비판이 상당하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이든 혁신성장이든 국민을 잘살게 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마치 덩샤오핑의 ‘흑묘백묘’ 담론과 같아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공정했는가에 대해 대다수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결과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하게 나타나고 부자들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결과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득의 격차가 큰 결과가 특정인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게 되었고 이런 결과가 ‘공정’하지 않다는 정권적 판단 하에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득주도성장으로 개인의 삶의 질이 나아진 집단이 있다는 통계 발표에 고개를 흔드는 이들도 많이 있었으나, 한편으론 소득이 낮은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최저임금의 상승으로 숨쉬기가 나아졌을 수도 있어 보인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시각은 ‘결과의 균등’을 이루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장하준 교수는 결과의 균등이 이루어진다면 공정한 사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한겨레, 2016.11.04., 인터넷). 장 교수는 결과의 평등을 이루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즉 복지 확대를 통한 소득 재분배를 우선 강조한다. 그리고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들의 우월적 지위 남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규제도 필요하다고 한다.

기회 균등, 어느 정도 결과 균등한 ‘공정’
‘공정’관념에서 볼 때 선별적 복지가 정답으로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선별적 복지가 성공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직면한 사회는 과연 기회가 균등히 보장되고 어느 정도 결과의 균등이 보장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해 보인다.
현 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존 롤스가 언급한 “최소 수혜가”를 보듬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에 깊은 통찰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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