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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임신부의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 투척한 안경신 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12.25 18:27 수정 2018.12.25 18:27

김 지 욱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제목부터가 엄중해 보인다. 여성의 몸으로, 그것도 임신한 여성의 몸으로, 게다가 폭탄으로 의거를 도모했다는 자체가 자못 대단하다. 그 활약의 주인공은 바로 33살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한 안경신 여사이다. 안경신 여사는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고, 1920년 미국 상하의원단 100여 명의 내한을 계기로 국내로 파견된 광복군 총영 결사대에 참가해 임신부의 몸으로 평남 도청에 폭탄을 투척하셨던 분이다.
안경신 여사(1888~미상). 평양 대동 출신인 안 여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양여고 2년 과정을 수료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서소문 지역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평양은 19세기 말 이후 서구문물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민족운동의 핵심주체가 된 지역이었는데, 여사는 평양의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돼 29일간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는 다양한 항일독립운동단체가 생겨났다. 상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고, 임시정부와 연결된 항일운동단체들도 많이 조직되었다. 여성들도 조직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했는데, 그 중 서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평양 대한애국부인회는 전국적인 지부를 둔 큰 조직이었다. 안경신 여사는 평양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는데 여기서 모집한 군자금이 2,400원이나 되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이 1원하던 시절이니 엄청난 거액이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일제경찰에 의해 조직이 발각되어 안경신 여사는 중국으로 망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경신 여사는 평소 외교청원 같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며, 조선이 독립할 길은 오로지 무력적인 응징뿐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일제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 즉, 투탄(投彈), 자살(刺殺), 사살(射殺) 같은 일회적 효과가 크게 주효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는 안경신 여사는 위에 적힌 무력적인 응징을 행하고자 바로 상해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대한광복군 총영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광복군 총영은 1920년 7~8월경 미국의원시찰단의 방한을 계기로 세계 여론에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고자 폭탄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안경신 여사는 결사대 중에 제2대에 포함되어 폭탄을 직접 소지하고 평양으로 잠입하였다. 거사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날 평양 시내에는 경고문을 뿌리기도 했다. 이 영향으로 일제 경찰들은 평양 시내를 삼엄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경신 여사는 1920년 8월 3일 그 경비를 뚫고 평남 도청과 평양 부청에 폭탄을 투척하여 평남도청 제3부인 평남경찰부 건물을 파괴하였다.  
의거 당시 여사는 임신 중이었는데, 의거 직후 함경남도에 피신했지만, 도피생활 7개월 만에 대동경찰서에서 여사의 피신지를 알게 되어, 출산 직후인 1921년 3월20일 체포되었다. 품에는 태어난 지 12일 정도밖에 안 된 핏덩이가 안겨 있었지만,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호송된 안경신 여사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안경신은 평남도청 폭파사건과 무관하다’는 내용의 투서를 총독부에 제출하고 평양복심법원으로부터 징역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형무소 안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아녀자라고 어찌 나라 잃은 설움이 없으리까? 조국이 있으매 내가 있으리니 대한의 여성들이여, 주저 말고 분기하라, 분기하라!”고 외쳤다고 한다. 무력적인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임신한 몸으로 폭탄의거를 펼쳤던 안경신 여사에게 정부에서는 1962년 독립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신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으며 폭탄의 폭음과 함께 살고 죽겠다고 말했던 안경신 여사의 강력한 의지 속에서 한국여성의 강인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평양 감옥에 수감된 지 채 석 달이 못 되어 모친이 세상을 떠나버렸고, 출생 직후 감옥에서 함께 생활한 아들은 영양 섭취를 제대로 못 해 시각장애인이 되었으며, 안경신 여사 자신에 대해서도 출옥한 후에는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조차 아무도 알지 못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남편이나 앞을 보지 못 하는 아들 등 가족들의 생사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독립유공자 서훈만이 쓸쓸히 유족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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