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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제주 해녀 투쟁을 이끈 부춘화 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1.06 17:26 수정 2019.01.06 17:26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목숨을 걸고 항거했던 제주도 해녀의 항일투쟁으로는 1918년 법정사 항일투쟁과 1919년 조천 만세운동이 있는데, 이에 못지않게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해녀 투쟁이 또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해녀 부춘화 여사를 중심으로 한 일제 파출소를 습격한 항일투쟁이다. 바다에서 먹을거리를 찾아 겨우겨우 목숨만 유지해오던 제주해녀들의 생존권 투쟁이자 민족의 현실에 대한 울분이 뒤섞여 발생한 제주 해녀 투쟁은 국내 최대 여성 주도 항일투쟁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고 또한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1931년부터 시작하여 다음해 봄까지 이어진 제주 해녀 항일투쟁은 연인원 1만 7천 명 이상이 참가했으며 집회와 시위 횟수 면에서도 238회나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제주 전역에 울림을 줬던 이 항일투쟁은 국내 최대의 어민투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렇듯 일제하 항일투쟁은 육지에서만 한정되지 않았고 먼 바다 한 가운데인 섬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항일투쟁의 주인공들이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인 제주 해녀들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으며, 먹고 살기 위해 거친 파도와 싸우기도 했지만 악랄한 착취를 일삼는 일제의 주구들과도 싸워야 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당시 한반도 전체를 식량창고로 여기고 수탈을 해오던 일제는 바다에서도 똑같은 짓들을 했는데 해녀들이 힘들게 물질을 하며 채취한 수산물들을 어용 어업조합을 통해 빼앗아가곤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방법도 악랄해서 조합 서기와 일본인 상인들이 짜고 무게를 속이거나 가격을 후려쳐서 헐값에 매수하기 일쑤였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제주해녀들을 얕보고 깔보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용 해녀조합은 물질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나 할머니들한테도 조합비를 받아갔고, 여기에다가 입어료, 소개비를 다 떼이고 나면 해녀 몫은 20퍼센트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이에 부춘화 여사를 중심으로 한 해녀들은 수차례에 걸쳐 부당행위를 하지 말 것을 건의하고 항의도 했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러던 차에 1930년 성산포에서 ‘우뭇가사리 부정판매 사건’이 발생했다. 경매를 통해 우뭇가사리가 근당 20전에 낙찰되었는데 조합 서기가 상인들과 결탁하여 18전으로 내려버렸던 것이다. 이는 당시 시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었다. 이에 격분하여 현재성 등이 항의하러 갔다가 오히려 29일간 체포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계기로 부춘화 여사를 비롯하여 5명의 해녀들이 선봉에 서서 자생적 해녀회를 조직하고 일제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7일 구좌면의 6개 마을에 거주하던 1,000여 명의 해녀들은 하도리에서 세화리 장터까지 시위를 하며 해녀조합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했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월 12일 세화리 5일장날에 신임 다구치 데이키 제주도사가 연두순시차 들른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300여 명의 해녀들은 빗창과 호미를 들고 다구치가 탄 차를 막아서고 구호를 외치며 항의를 시작했다,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들을 몰아내라.”
“해녀조합은 해녀의 권익을 옹호하라.”
한편으로는 구호를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해녀의 노래’를 합창했다. 이 ‘해녀의 노래’는 항일 비밀결사체인 ‘혁우동맹’을 조직한 강관순이 옥중에서 작사한 것이었다. 이 노래는 해녀들의 삶과 애환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제주 전역과 타 지방의 해녀들도 즐겨 부르던 것이었다. 제주 해녀들의 참상을 담고 있는 이 가사의 마지막 4절에는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라고 되어 있다.
제주 해녀들의 대규모 집단시위에 당황한 일본 순사들은 총칼로 진압을 했고, 1월 24일에는 야학교사 청년들을 잡아가 해녀들을 의식화한 주범으로 몰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해녀들은 다시 1월 26일에 500여 명이나 모여들어 세화리 파출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박살내 버렸다. 이때 부춘화 여사 등 해녀 20여 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물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다 당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일경은 목포에서 지원군을 동원하여 주동자들을 압송하려 했고, 이에 제주 해녀 800여 명은 더욱 거세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경은 공포탄을 쏘아 해산시키기에 이르렀다.
일경에 체포된 부춘화 여사는 해녀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모든 것은 내가 단독으로 주도했다’며 혼자 죄를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온갖 고문을 참아내며 2년 6개월이란 긴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08년 구좌읍 하도리에서 태어나 15살 때부터 물질을 배워서 낮에는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밤에는 사립보통학교 야학부에서 자주정신과 민족의식 교육을 배운 부춘화 여사는 21살 되던 해에 구좌면 해녀회장으로 선임되어 제주도 3대 해녀 항일투쟁 중 하나를 이끌었던 것이다. 2003년에 뒤늦게나마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것으로 위안을 삼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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