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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고공농성 1호 여성 노동운동가 강주룡 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1.15 19:35 수정 2019.01.15 19:35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굴뚝 위에서 보낸 작년 1월은 여태껏 살면서 겪은 가장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 모 기업의 노동자 대표가 75m 굴뚝에서 426일간의 고공농성을 벌인 뒤 지상으로 내려와서 언론 인터뷰를 한 내용이다.
그리고 또 뉴스엔 ‘택시기사 운송수입금 전액관리제(완전월급제)시행을 요구하며 전주시청 앞 광장 조명탑에 올라간 노동자가 오는 16일로 고공농성 500일째를 맞는다.’고 나와 있다.
왜 이들은 굴뚝, 송전탑, 옥상, 전광탑, 조명탑, 다리 난간, 골리앗 크레인 등 높은 곳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딱하고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에 가장 유리한 곳이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 여성 노동운동가 1호로 평가 받으며 고공농성의 첫 신호탄을 쏘아올린 이는 바로 강주룡 여사로 알려져 있다.
때는 바야흐로 1920년대 말. 그 무렵 조선에서는 노동운동이 일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국내 자본주의가 일정 궤도에 오르자 자연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도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여기엔 사회주의자들의 노동현장 참여와 1929년도의 세계 대공황이 상승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공황의 여파로 고무 제조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되고, 당시 조선의 고무 공업계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1930년 5월 서울에서 전조선 고무 공업자대회를 열고 노동자 임금 인하를 결의하였다. 이에 호응해 강주룡 여사가 다니던 평양 선교리 평원고무공장도 1931년 5월 16일 일방적으로 17%의 임금 삭감을 통보했다.
이에 강주룡 여사를 비롯한 노동자들은 반발을 하게 되고,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들을 대표하여 일제와 결탁한 자본가들을 비판하며 파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파업 개시 12일이 지나도록 회사 측이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자 노동자들은 5월 28일 굶어죽을 각오로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러자 조선인 사장은 29일 새벽 1시경 일경을 불러들여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해산해 버렸다.
공장에서 쫓겨나자 억울함을 호소할 길 없게 된 강주룡 여사는 평양 금수산 을밀봉 정상에 위치한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호소하였다. 당시 을밀대는 평양 시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데다 올라가면 평양 시내가 한눈에 보여 산책코스로 인기가 좋았던 곳이다. 즉 이 을밀대는 11미터 높이의 축대 위해 세워진 정자로,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었다.
이에 강주룡 여사는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고 줄타기하듯 올라가 을밀대 지붕 위에 앉아 밤을 지새우고는 평양의 새벽을 깨우며 “여성 해방, 노동 해방”을 목이 터져라 외쳤던 것이다. 당시의 언론에 난 기사 제목만 봐도 그가 얼마나 호소력 있게 투쟁했는지 알 수 있다.
‘을밀대 옥상에 올라가 파업선동의 연설’-『매일신보』 5월 30일자
‘아사동맹을 지속 을밀대에서 철야 격려’-『조선일보』 5월 30일자
‘평양 을밀대에서 체공녀 돌현’-『동아일보』 5월 30일자
이와 함께 당시 언론 사진에는 을밀대라고 커다랗게 쓰인 현판 위 지붕에 강주룡 여사가 당당히 앉아 있고, 지붕 아래에는 일본 경찰인 듯한 남성 등이 그를 감시하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와 있다. 이 얼마나 적나라한 모습인가.
일반 사회의 무관심 속에 강주룡 여사를 비롯한 여공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사회에 알리고, 여론을 환기시킬 필요성을 절감하고는 우리나라 노동운동 역사상 최초의 고공농성을 벌였던 것이다.
190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 여사는 14세 때 아버지의 부도로 서간도로 갔다가 1921년 20세의 나이로 통화현의 5세 연하 남편 최전빈을 만나 혼인하였다. 하지만 강주룡 여사가 24세 되던 해에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남편이 병사하자, ‘남편 죽인 년’이 되어 시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후 가족들과 귀국하여 평원고무공장의 여공으로서 가장 역할도 하며 살다가 고공투쟁의 여장부로 신문지상의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근 1년 동안의 감옥 생활과 잦은 단식투쟁으로 인해 극도의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등이 겹쳐 보석을 받았지만,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출감 두 달 만인 1931년 8월 13일 평양 빈민굴에서 30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강주룡 여사를 비롯한 여공들의 처절한 생존권 투쟁은 별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여성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항일민족운동으로 연결되는 의미를 갖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1931년도의 얘기지만 을밀대 위에서 외치던 강주룡 여사의 목소리는 지금도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는 것에 비춰 보면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정부가 2007년 강주룡 여사의 투쟁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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