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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 의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1.21 18:55 수정 2019.01.21 18:55

김지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918년 러시아 극동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늪에 빠져 들었다. 레닌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적군과 러시아 황제 차르의 절대왕정을 지지하는 백군이 모두 잔혹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으며, 서로 상대편을 처형하는 것을 평범한 일상처럼 여겼다.
그런 처형 중 하나가 1918년 가을이 막 들어서려는 9월 16일 이른 새벽 아무르 강(흑룡강) 연안 최대 도시인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서 있었는데, 그날 한 무리의 공산당원들이 백군 병사들의 총에 처형됐던 것이다.
총살된 이들 중에는 폴란드식 성을 가진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김애림이란 이름의 한국계 여성으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공산주의자로 세계에 알려진 인물이었다.
김알렉산드라 의사(1885∼1918). 본명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스탄케비치). 일찍이 러시아에 건너와 개척 사업을 하던 함경도 경흥 출신의 김두서의 딸이자 한인 이주민 2세다.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은 그리스정교 예법에 따라 아버지가 지은 것이었다.
10살 때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친구인 폴란드계 러시아 철도 기술자인 스탄케비치의 손에서 자랐는데,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초중등학교를 마치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범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그녀를 지원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녀는 당시 러시아 대학생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던 사회주의 좌파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졸업하고 한때 교원이 되기도 했으나 아버지의 친구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하였다가 1914년에 이혼하게 되었다.
1914년 7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자 러시아 정부는 혁명당원들의 봉기를 우려한 나머지 김알렉산드라 의사를 비롯한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의 남녀 사회당원들을 모두 우랄 방면으로 쫓아내 버렸다.
이때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조선인 통역 김병학이 한인 동포 수천 명을 속여 거짓 계약을 체결하고 페름스크 대공장에 데리고 가서는 정상임금의 절반도 주지 않고, 고용기간도 제 멋대로 해 조선인 노동자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이때 김알렉산드라 의사는 한인노동자들의 소송 대리인을 맡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고, 마침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으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재판은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이 소송사건을 계기로 일약 스타가 된 김알렉산드라 의사는 1917년 초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러시아공산당 전신)에 입당하였다가 1918년 1월에는 하바로브스크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재외 한인 가운데 장관급 고위직에 오른 분은 그가 처음이었다. 동아시아의 두 주요 언어에 능통하며 고등교육을 받은 젊고 헌신적인 여성, 동양여성의 외모를 가졌지만 흠결 없는 고상한 러시아어를 구사하던 김알렉산드라 의사는 볼세비키 당의 입장에서 볼 때 그야말로 신의 선물이라 할 정도로 활용가치가 높았던 것이다.
그리고 1918년 4월 28일 이동휘·김립·박애·오성묵 등이 하바로브스크에서 한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할 때 여기에도 참가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극동지역의 한인 사회 내에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차르 체제를 옹호하는 백군과의 싸움에 나서는 한편 반일투쟁에도 앞장섰다.
하지만 후원자 격인 극동 소비에트 정부가 붕괴되고, 러시아 혁명군의 진압을 도와주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함과 일본군 2만 8천 명의 병력에 볼세비키 혁명세력은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전황이 불리하게 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탈출을 서둘렀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아무르 강을 운항하는 기선 <바론 코르프호>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기선은 곧 백군의 의해 나포됐고 김알렉산드라 의사를 포함해 배에 타고 있던 공산당 간부 전원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지 6일 뒤인 9월 16일, 하바로브스크 아무르 강 우쩌스 절벽에서 김알렉산드라 의사를 비롯한 18명이나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그들 눈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하지만 김알렉산드라 의사는 총살 직전 붕대를 벗겨낸 후 ‘13도’를 상징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의미에서 열세 걸음을 걸어가서는 큰소리로 외쳤다.
“한국 각 도의 공산주의의 씨여! 훌륭한 꽃으로 피어라.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 꽃을 손에 들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라!”
마지막 절규가 끝나자마자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고, 그 자리에 고꾸라진 육신은 아무런 말없이 흐르는 아무르 강물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한국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선구자가 될 한 여성의 생애가 서른넷 안타까운 나이로 그렇게 마감됐다.
항일 독립운동 과정에서 일경에게 고문을 당해 옥사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애국선열들이 엄청 많다. 하지만 일본군에 체포되어 공개적으로 총살당한 경우는 김알렉산드라 의사가 유일하다고 하겠다.
이 모든 서사는 1920년 4월 3회에 걸쳐 ‘뒤바보(본명 계봉우)’라는 필자 명의로 ‘김알렉산드라 소전’이라는 제목으로 ‘독립신문’에 게재되었다. 현재도 하바로브스크의 마르크스가 24번지에는 김알렉산드라 의사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극동지방을 여행할 때 꼭 둘러볼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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