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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육사의 청포도를 구해낸 이병희 항일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2.17 17:03 수정 2019.02.17 17:03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병희 투사는 1918년 1월 14일 서울의 양반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이경식은 1925년 9월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장진홍 의사의 대구 조선은행 폭탄투척의거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바 있다. 할아버지 이원식은 윤세복, 이시열 등과 함께 만주에 동창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여성독립운동가 이효정은 그의 친정조카이다. 온 집안이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이병희 투사는 중국을 오가며 운동에 투신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 일경의 감시 속에 어머니는 말도 잘 못하는 우울증에 걸렸고, 이병희 투사가 옥중에 있을 때 별세하였다. 이병희 투사는 15세에 서울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자상업학교(서울여상 전신)에 1년간 다니다 중퇴하였다. 경성여상은 1926년에 여성을 위한 최초의 실업학교로 설립된 후 당시 선망하던 일본기업이나 은행에 취직할 수 있어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그러한 경성여상을 채 1년도 안 돼 그만둔 것은 조부 이원식의 영향이 컸다.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직접 일제와 싸워야 한다”며 자퇴를 강력하게 권했던 것이다. 조부의 의견에 따라 결국 이병희 투사는 서울의 종로에 있던 제사공장 종연방적에 취직을 하였다. 종연방적 취업은 결국 오늘날 시쳇말로 ‘위장취업’을 하였던 셈이다.
여기서 2년여 남짓 근무한 이병희 투사는 1935년에 임금인상 투쟁을 일으켜 파업을 주도하였다. 당시의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이병희 투사는 1935년 8월 김희성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공작의 일환으로 조선 내의 각 지역에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기로 했다.
이병희 투사는 이때 여공 홍종래를 본부책임자로, 철도국 경성공장 직공 최병직, 경성전기 윤순달, 화신 여점원 박온, 학생 최호극을 각 직장의 책임자로 삼아, 서울 영등포와 평양 등의 주요 공장에 숨어들어 운동을 펼치려다, 1936년 12월 핵심 11명이 그만 종로경찰서에 체포되고 버렸다. 그 후 1939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미 2년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였다. 이후에도 삿뽀로 맥주, 기린 맥주회사, 영등포 방직공장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여 여러 번 체포, 고문을 받으며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었다.
국내에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이병희 투사는 1940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여성의 의열단 가입은 문서와 무기를 전달하는 연락책 역할과 군자금을 모집을 맡는 데 유리했다. 여기서 이육사를 만나게 되는데 1943년의 일이었다. 이육사는 김병희 투사보다 2년 늦은 1942년에 북경으로 망명하여 모종의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육사를 만난 그 해 9월 이병희 투사는 일경에 체포되어 북경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 구금되었고, 이육사는 그 해 7월 고향에 들렀다가 서울에서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얼마 뒤 이육사는 북경으로 압송되어 두 사람은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운명이 되었다. 하지만 이병희 투사는 1944년 1월 11일 결혼을 조건으로 석방되었으나, 5일 뒤인 16일 이육사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급히 감옥으로 달려간 이병희 투사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당시 40세였던 이육사의 주검 앞에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저녁 5시가 되어 달려갔더니 코에서 거품과 피가 나오는 거야, 아무래도 고문으로 죽은 것 같아”
몸서리치듯 이병희 투사는 당시를 회고했다.
이병희 투사와 이육사 두 사람은 동지이자 친척 사이였다. 고문으로 사망한 경우 일제는 이를 감추기 위해 시신을 훼손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따라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재빨리 시신을 수습하고, 유품을 챙겼다. 육사의 유품은 마분지에 쓴 ‘광야’, ‘청포도’ 등 시 몇 편과 만년필 등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 유명한 ‘광야’, ‘청포도’ 등의 시가 우리 곁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고 가족에게 유골단지를 넘겨줄 때까지 언제나 품에 안고 다녔다. 심지어 후에 혼인을 하게 되는 토목기술자 조인찬과 맞선을 보는 자리에까지도 안고 나갔다고 한다.
이병희 투사는 결혼해서 몽고 탄광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해방 후 신의주의 시댁을 거쳐 남편과 함께 월남하였다. 아들과 수양 딸 한 명과 서울에서 살다가 2012년에 별세하였다.
여자의 몸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음에도, 게다가 애국시인 이육사의 유골과 유품을 수습한 주인공임에도 이병희 투사의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외아들조차 어머니의 이력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좌파 진영에서 활동한 전력이 혹시나 자식에게 누가 될까봐 숨겨왔기 때문이다, 79살이었던 1996년 뒤늦게 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음에도 원망하기는 커녕 오히려 소원이 없다고 한 말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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