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육혈포를 차고 다닌 조신성 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3.03 18:07 수정 2019.03.03 18:07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가 계속되자 국내에서는 더 이상 항일투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독립지사들은 그리운 고국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거나 산속으로 숨어들어 항일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 중 대한독립청년단은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결성된 일종의 ‘모험단’의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당시 일본 순사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으거나, 독립사상을 선전하거나, 일본인 관리나 그들 밑에서 부역하던 조선인들에게 협박장과 경고장을 보내는 등의 다양한 대일 투쟁을 벌였다. 또한 국내로 파견된 요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안내하는 등의 활동도 하였다.
이 중에서 평안남도 영원, 맹산, 덕천 등의 3개 군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당시 서북지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도자격인 ‘총참모’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신성이라는 여성이었다. 당시 이 지역의 조직원만 80여 명이었는데 여성의 신분이 높지 않던 시절, 여성이 앞장서 지도자로 나섰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조신성 투사는 맹산군 선유봉 호랑이굴에 대한독립청년단 본부를 두고 6천여 원의 군자금 모집과 육혈포 7자루, 탄환 3백 발 등 무기를 구입했으며, 또 인쇄기 3대와 활자 1만2천 개를 구입해 독립항쟁을 함으로써, 당시 일제 앞잡이들에게 간담을 서늘하게 했는데 이는 남자라도 감히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는 1873년 평안북도 의주 인근 지역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뱃속에 석 달쯤 있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집을 나가버렸고 9세 되던 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고모와 함께 살다가 16세 되던 해에 당시의 조혼풍습대로 결혼을 하였으나 결혼생활 6년 만에 방탕한 남편은 가산을 탕진한 후 자살해 버렸다.
결국 조신성 투사는 22세에 과부 신세가 되었다.
이후 조신성 투사는 1897년 평북 의주읍 교회에서 선교사 배위량(W.M. Baird)에 의해 기독교에 의탁하게 되었다. 이후 기독교를 통해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를 가진 귀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민족과 여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24세 되던 해에는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과 상동 소재 교원양성소를 졸업한 후 소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 후 28세 되던 해부터 6년 동안 이화학당 사감으로 재직하였는데 이때 이준 선생을 만나 함께 한국 최초의 조선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조신성 투사는 많은 민족운동가들과 만나게 되는데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도산 안창호였다.
그 후 나이 34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갑작스러운 신경쇠약으로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에는 부산 규범여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10년 사직하고, 평양으로 가서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진명여학교 교장직을 맡아서 활동하였다.
진명여학교는 도산이 처음 설립했을 당시는 번창했으나 국권을 상실한 후 안창호의 해외 망명 및 경제적 지원을 담당하던 평양부인회 회원들의 탈퇴로 폐교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신성 투사가 진명여학교를 책임지게 되었는데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를 다시금 번창하게 하였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무렵 조신성 투사는 모종의 비밀사령을 받고 북경으로 떠났다가 1919년 11월 만주 관전현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맹산독립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맹산독립단 결성 후 조신성 투사는 김봉규와 함께 맹산군수 전덕룡을 찾아가 권고사직케 하고, 일본 순사 처단, 친일부호들의 재산 탈취 등 다양한 의열투쟁을 하다가 일본순사에 체포되어 6개월의 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출옥일이 다가오자 1921년 일경은 다시 ‘맹산독립단사건’을 일으켜 단원 80여 명을 검거하였고 조신성 투사는 다시 2년6개월의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때 나병삼은 사형, 나신택은 무기징역을 받는 등 19명이나 처벌을 받았다.
1934년 ‘신가정’의 한 인터뷰에서 그간의 항일투쟁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가슴에다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시시로 변장을 하여가며 깊은 산 속을 며칠씩 헤매고, 생식을 하여가면서 고생을 하던 때, 또 주막에서 순검에게 잡혀 가지고는 격투하던 때, 그리고 오도 가도 못 하고 끼니를 굶어가며 산속에서 며칠씩 숨어 있던 때(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 것을 보면 당시 그가 얼마나 처절하게 투쟁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출옥 후 조신성 투사는 다시 교육운동에 매진하였다. 평원군 한천으로 가서 사숙을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쳤으며, 대동군 대평에서 취명학교를 운영하였고, 1928년에는 근우회평양지회를 조직하여 교육활동에 더욱 매진하였다.
그 후 조신성 투사는 해방이 되자 72세의 나이로 월남하여 1948년 대한부인회 부총재로 활동하다가, 1953년 5월 5일 부산의 한 양로원에서 80여생을 마감하였다. 늦게나마 정부에서 이를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는 것은 천만다행이라 하겠다.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