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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추가 서훈된 유관순 열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3.11 19:53 수정 2019.03.11 19:53

김지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정부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의 독립유공자 서훈 등급을 상향했다. 지금껏 유관순 열사가 3·1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훈이 5단계 중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에 불과해 이를 재평가해야 된다는 대중들의 여론이 높았고, 이에 정부에서 2월 26일 국무회의를 통해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정신을 길러 민족정기를 드높이고자 유관순 열사에게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기로 의결한 것이다. 이로써 유관순 열사의 서훈은 예우상으로 안창호,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준 등의 독립운동가와 동급이 되었다.
더불어 최근에 개봉된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로 유관순 열사가 다시 한 번 조명 받고 있다. 이 영화는 일종의 저예산 영화이지만, 1919년 일제강점기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이끌다 체포된 후, 서대문감옥 8호실에서 유관순 열사가 겪었던 1년간의 수감생활을 담담히 담고 있어서 울림이 크다고 하겠다. 세평도 안 되는 열악한 환경에서 핍박 받았지만 영혼만은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18세의 유관순과 여성 동지들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일제에 의해 열사가 고문을 당하고, 학살당하는 장면이 비교적 순화되어 표현되었다고는 하나,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의 가슴이 찢어질 정도의 장면들로 가득했다.
유관순 열사의 눈물겨운 독립운동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서훈등급 상향과 영화 상영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조명해 보고자 한다.
유관순 열사는 1916년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고등과 1학년 때에 3·1만세운동을 맞이하게 되었고 3월 5일에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귀향하였다.
3월 13일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 열사는 자신의 마을 용두리가 너무나 조용한 것을 보고 당시 고향 유지였던 기독교 전도사 조인원과 지역의 지도자 김구응, 이백하 등에게 독립선언시위를 벌여야 함을 설파했다. 결국 4월 1일에 청주, 진천, 청원 일대를 망라한 대규모 시위를 아우내 장터에서 벌이기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그날부터 마을 청년과 어른들과 부녀자들은 각자에 맞는 역할을 분담하여 참여하게 되었는데, 영화 장면에서도 나오지만 이때 유관순 열사는 손수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리고 거사 하루 전날 밤에 거사를 알리는 봉화를 매봉산에서 올리게 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 여섯 고을의 동서남북 사방팔방 산봉우리에 봉화가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드디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천원군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 진천 방면에서도 시위군중들이 모여들어 삽시간에 3천여 명이나 운집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미리 짜놓은 대로 친구들과 함께 장터 길목마다 책임을 지고 서서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정오가 가까워지자 흰 차일을 덮은 듯이 군중들의 물결이 장터 한복판을 메웠다고 한다.
오후 1시가 되자 장터 한복판에 대형 태극기가 세워지고 가마니 단 더미 위에 조인원이 올라서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감격과 흥분으로 군중들도 만세를 힘껏 불렀다. 그리고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수많은 군중들이 만세를 연호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50보 거리에 있던 헌병주재소의 헌병이 쫓아와 군중을 향해 발포하고 총검을 휘둘러, 유관순 열사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처참하게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고, 3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헌병소장은 처음부터 시위군중에게 발포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관순 열사도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심문받는 와중에도 “이 일은 처음부터 전부 내가 주장해서 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내보내라”고 주장하였다. 이윽고 헌병분견소에서 공주감옥으로 넘겨진 유관순 열사는 공주재판소의 재판을 받고 경성복심법원에 항소를 하였다. 여기에서 최고형인 3년 선고를 받고 그 악명 높은 서대문감옥 8호 감방에 수감되었다.
이 8호 감방에서 있었던 일제의 악랄한 고문과 유관순 열사의 처절한 저항에 관한 1년 동안의 얘기가 이번 영화의 줄거리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유관순 열사 이외에도 수원 지역 기생들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김향화, 유관순의 이화학당 선배로서 개성 시위를 이끈 권애라, 그리고 8호실의 막내로 설정된 가상의 인물 다방종업원 이옥이 등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한없이 비좁은 세 평의 8호실 감옥에는 25명의 독립운동열사들이 더 있다. 이들의 이야기가 비록 짧은 영화 한 편으로 낱낱이 밝혀질 수는 없지만, 오늘을 사는 내가 과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순국열사들에게 커다란 빚을 졌음을 깨닫게 하는 영화였다. 잔인무도한 고문 끝에 열사가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 같은 감옥의 한 남성 독립운동가가 “왜 하는 거요”라는 질문을 던지자, 유관순 열사는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합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말 한마디가 아직도 내 가슴과 뇌리에 오롯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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