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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기획특집] 안동의 전통사찰을 찾아서(4)

조덕수 기자 기자 입력 2019.03.14 16:21 수정 2019.03.14 16:21

석양이 아름다운 사찰 - 태화산 서악사(太華山 西岳寺)

태화산 서악사 현판
태화산 서악사 현판

 

안동시 태화동 서악길 67-14 번지(경덕 중학교 뒤) 태화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서악사는 시내에서 서쪽의 외곽에 있다. 이 지역은 토지구획정리와 더불어 주변 환경이 주택지로 개발되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나, 오히려 초행길인 사람은 바둑판과 같이 정리된 골목길과 비슷비슷한 주택으로 인해 찾기가 어려울 수 있다. 손쉽게 찾아가는 길은 중앙고등학교 정문까지 가서 담장을 끼고 서쪽으로 100m 정도 가면, 좌측 태화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와 산 중턱에 우뚝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누각을 찾을 수 있다. 이 누각이 광강루이고 누각 서쪽에 서악사가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시세가 커지자 서악사가 위치한 태화산은 도심 속의 공원으로 변모하고 있다.
천년고찰 서악사는 이곳으로 석양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 서악사루전일락(西岳寺樓前日落)이라 하여, 안동팔경 중 하나로도 속해 있다. 옛날에는 안동강에 물이 많을 때면 태화산 아래까지 물이 찼다고 하며, 안동강 갈대밭으로 짙게 깔리는 운무(雲霧) 또한 그 운치가 대단했다고 한다. 서악사는 안동 본부(本府)의 사악(四嶽) 중 하나로 지덕(地德)을 돕기 위한 비보사찰(裨補寺刹)이다.
본부(本府)의 사악(四嶽)은 동(東)은 동악이라 하며 절이 있고, 남(南)은 남산인데 순천사가 있으며, 서(西)는 서악이며 절이 있다. 그리고 북(北)은 금학산인데 수정사라는 절이 있다. 본부(本府)의 호장(戶長)이 매년 계절마다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있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입각하여 세운 절을 흔히 비보사찰(裨補寺刹)이라고 하는데, 신라 말, 고려 초의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주장한 것이다.
서학사 역시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지세(地勢), 산수(山水), 강(江) 등을 종합해서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쇠약하고 기운을 거스르는 땅이 불행을 가져오기에 사람의 몸에 쑥을 놓고 뜸을 뜨듯이 비보사찰을 세워 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절을 세웠다고 한다.
안동에는 서악사를 비롯 법흥사, 법림사, 임하사 등이 대표적인 고을의 비보사찰이며, 자연재해나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승려들이 상주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안동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영가지(永嘉誌)에 “서악사는 부의 서쪽 5리 지점에 있으며, 본부 사악의 하나이다. 역시 방진을 비보하는 것이다. 석불이 두 개가 있는데 모두 동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각기 한 쪽 다리를 펴서 흘러오는 물을 차는 모양을 하였다. 또, 두 불상 모두 양손을 들고 있는데 오른손은 물러가는 기를 끌어안는 모습이며 왼손은 오기를 흔들어내는 모양이다”

◇ 서악사의 건물과 문화재
건물로는 원통전과 요사채 2동이 있다. 주 법당인 원통전 내부에 있는 불상은 근래에 제작한 것이고 탱화 6점은 보존 가치가 있는 유물로 평가되는데, 6점 중 3점은 1770년(영조 45)에, 1점은 1868년(고종 5)에 제작한 것이다. 또 법당 안에 있는 동종은 1933년 3월 조성된 것으로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 범종 양식을 충실히 따른 귀중한 유물이다. 절 입구 바위에는 ‘연파독역산(蓮坡讀易山)’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이 글귀는 조선 후기 한성판윤을 지낸 장화식(張華植:1853-1938)이 이곳에서 ‘역경(易經)’을 읽었다는 뜻으로, 절 뒤편에 장화식의 묘가 있다.
 
◇ 태화산 서악사의 역사
서악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은사의 말사이다.
서악사의 창건 시기나 내력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서악사에 소장하고 있는 사기(寺記)인 서악사기(西嶽寺記), 태화산 운대사 상량기문, 극락전 삼존불상 개금기에도 사찰의 자세한 내력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못하고 있고, 구전되어 오는 사찰의 창건과 사찰의 명칭, 그리고 영조 이후의 극락전을 중창한 사실들에 대하여 적고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서악사의 창건은 신라 말 경문왕(景文王)때 도선국사에 의하여 세워졌다. 사찰의 명칭도 창건당시에는 운대사(雲臺寺)였다가 후에 서악사로 개명되었다. 개명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본부의 사악인 하나만 서악에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서악사기나 운대사상량기문과 같이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은 주로 영조 때 이루어진 극락전 중창불사 이후의 사실들을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이 쓰여진 1800년대에는 이미 옛날의 기록들은 모두 없어지고 참고 할 만한 자료들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다.
앞의 기록들에 의하면 거의 폐사가 된 이 사찰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진 것은 벽파 해운이 법주(法主)로 있던 영조 24년(1748)이다. 이 보다 4년 앞선 갑자년(1774)에 태화산 중턱에 있던 절을 아래로 옮기고, 좌우에 승사(僧舍)를 지었으나 법당은 짓지 못하였다. 4년 뒤인 1748년 광수(廣守), 최상(崔尙), 광후 3인이 풍산헌 삼백사(三百寺)의 오래된 목재를 옮겨서 법당을 짓고 학가산 백운암에 있던 삼존불을 옮기고 이듬해 이 삼존불에 다시 금을 입히는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하였다. 이 삼존불은 현재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다. 극락전은 영조 당시에 삼백사의 구재를 옮겨지었다는 기록 외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건물로 보인다. 본부 사악의 하나인 서악의 허한 기를 보충하고 지덕을 쌓아 제액초복하여 길한 기운을 받아들이고 갈무리하며 흉한 기운은 내몰고 막음으로서 평안을 누리고자 서악 주위에 여러 가지 비보압승물을 세우게 된다. 영가지 기록을 토대로 하여 서악(西嶽)의 비보압승물을 살펴보면 먼저 숲을 조성하여 허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한 칠림(漆林)의 기록이 있다. 칠림은 서악의 동쪽에 있는 모은루 서쪽에 있다. 서쪽으로는 내산이 있는데 굶은 호랑이 형상을 하고 바로 본부와 마주하고 있는 모양이 매우 흉하였고, 또 계암이 있어서 역시 흉한 모양을 하였다. 이 칠림이 있음으로써 그 흉한 것을 가렸다. 산 밑에는 깊은 못이 있어서 그 형상을 삼켜 가리기도 하고 내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종이를 만드는 절구를 두고 그 기운을 찧어 부수었다고 한다.
모은루는 천순(天順) 갑신년(1464)에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정해년에 교체된 한치의(韓致義)가 세운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서악의 서쪽에 있는 내산이 굶은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고 계암이 있어 이 또한 흉하였는데 칠림을 조성하여 흉한 것을 가렸다고 한다. 산 밑에는 서영지(西暎池)를 파서 내산의 굶은 호랑이 기운을 삼켰다고 한다.
 
◇ 건축물의 구성과 배치
■ 극락전(極樂殿)
서악사의 본전으로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중정에서 250m정도 자연석 석축물을 쌓고 자연석 기단위에 주춧돌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이며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을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영조 때 삼백사의 구재를 옮겨지었다는 기록 외에는 중수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건물로 추정된다.
공포는 다포양식에 익공형을 가미한 건물로 부연을 달아 다른 건물보다 크고 단청이 잘되어 있다. 건물의 정면 어칸과 좌우 협칸에는 사분합 넉살문이 설치되어 있고, 좌측면과 우측면의 전면에도 외문으로 된 넉살문이 나 있다.
극락전의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어칸의 뒷벽에서 약 60m 정도 띄워서 불벽과 칠성산이 아닌불단을 조성하여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주불은 좌불이며 좌우 협시보살은 협상이다. 이 삼존불은 학가산 백운암에서 모셔져있던 것을 백운암이 폐사되자 이곳으로 옮겨왔고, 이듬해 삼존불에 금을 입히는 개금불사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 개금불사가 1749년에 있은 후에도 세 차례 더 개금불사가 있어서 불상의 보존 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법당의 천정은 우물 천정으로 되어 있고 내부에 범종이 걸려있다. 좌측 문 위에는 삼존불의 개금불사에 대한 기록인 극락전 삼존불상 개금기 현판이 걸려있다.
■ 삼성각( 三聖閣)
극락전의 우측 조금위에 자연석 기단과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작은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에 풍판이 없다. 건물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후면 벽에는 불단을 설치하고 좌측으로부터 산신상·독성상·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삼성각으로서 칠성신이 아닌 약사여래좌상을모시고 있는 것이 특이하나 약사여래불을 모실 전각이 없어서 이곳에 봉안한 듯하다.
약사여래불 뒷벽에 칠성탱화를 모시고 있다. 약사여래좌상은 석조 개금으로 1962년부터 이곳에 모시고 있다. 크기는 높이 50cm, 너비 29cm이다. 독성상은 흙으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높이 46cm, 너비 43cm이다.
산신상은 돌로 제작하였고 높이 44cm, 폭 118cm정도이다. 벽면의 탱화는 산신각 좌측에 산신탱화, 우측에 칠성탱화를 모시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5cm, 너비 110cm 정도이다.
■ 응향각(凝香閣)
극락전의 좌측에는 자연석으로 기단과 주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현재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지붕은 홑치마 맞배지붕에 풍판은 없다. 정면의 양쪽에 반 칸 크기의 퇴를 내어 수납공간으로 사용하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좌측 한 칸은 주지가 사용하고 있으며 종무소를 겸하고 있다. 우측 2칸은 통칸으로 방을 꾸몄다. 좌·우 협칸에 출입문으로 띠살문을 달았고 어간에는 머름중방을 설치하여 문을 열었을 경우에도 밖에서 방안이 잘 보이지 않도록 하였으며 작은 살창과 여닫을 수 있는 띠살문을 달았다.
■ 설선당(說禪堂), 심검당(尋劍堂)
응향각 앞에 있는 요사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보스를 하면서 개량하여 지붕과 기둥을 제외하고는 옛 모습을 찾기 어렵고 내부에도 벽을 헐고 넓은 공간을 꾸며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 천불전(千佛殿)
산령각 앞에 새로 신축한 건물이다. 외관만 마무리 되었고 아직 내부공간과 단청은 되지 않았다. 이 전은 본전인 극락전이 좁고 협소하여 신축하였다. 극락전의 삼존불을 이곳으로 옮기고 목불로 된 천불상을 봉인하기 위하여 현재 천불상을 조각하고 있다. 디딤돌 3층 기단과 원형 주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고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을 사용하였다.

◇ 서악사 홍매화와 배롱나무
봄과 함께 서악사에 예쁜 매화가 피었다. 서악사 뜰에 매화향이 가득하다. 서악사의 매화는 총 네그루가 있는데 두 그루는 청매화, 두 그루는 홍매화 나무다. 그런데 나무별로 꽃을 피우는 시기가 약간 차이가 나서 꽤 오래도록 매화를 볼 수 있다. 서악사에선 이 매화를 이용해 매화차를 마신다고 한다.
서악사 정면에는 수령이 200년 된 보호수인 배롱나무가 있다. 여름에 핀 꽃은 법당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법당입구에 절벽처럼 신기한 조합을 이루고 있다.
주지 승헌스님을 만나려고 했으나 종무소, 법당, 사찰경내를 둘러보아도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 뿐, 절을 지키는 스님이나 보살 한 분도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조덕수 기자 duksoo1144@hanmail.net

사악사 대웅전을 알리는 현판(극락전)
사악사 대웅전을 알리는 현판(극락전)
서악사 삼성각
서악사 삼성각
서악사 천불전
서악사 천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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