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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미주 독립운동의 대모 이혜련 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3.17 17:16 수정 2019.03.17 17:16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민족 수난의 시대에 독립운동을 전개한 혁명가의 아내의 삶이란 참으로 고되고, 힘들다. 한편으론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한편으론 자식들의 어머니로서, 한편으론 독립운동가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살림꾼으로서, 그리고 본인 스스로가 독립운동가로서,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창호의 아내 이혜련이 그랬고,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이 그랬고,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가 그랬으며, 곽낙원, 조마리아 등도 그랬다.
오늘은 이역만리 미국에서 남편 없이도 흥사단의 살림을 꾸려나가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동지들을 지원하고, 5남매의 자녀를 훌륭히 키워낸 이혜련 여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혜련 여사는 평남 강서에서 1884년 4월에 서당 훈장인 이석관의 장녀로 태어나,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고모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1897년 13세 되던 해에 부모가 정해준 약혼자 도산 안창호를 따라 서울로 와서 정신여학교에 입학한 후 신학문을 배웠다.
1902년 18세 되던 해에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행이란 장도에 오르고는 해방이 될 때까지 고국 땅을 밟을 수가 없었다. 어려운 미국생활에서 한인들의 단결이 절실함을 느끼고 있던 도산은 첫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한 후 리버사이드에서는 ‘노동주선소’를 세웠고, 1905년에는 ‘공립협회’를 설립했으며, 1907년에는 ‘대한신민회’를 결성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해 매진했다.
도산이 이러한 활동으로 분주할 때 이혜련 여사는 파출부로 활동하면서 남의 집안 살림과 바느질을 통해 돈을 모아 어려운 삶을 영위해 나갔다. 1907년 2월 고국에서의 신민회 활동을 위해 도산이 홀로 귀국할 때, 이혜련 여사는 도산에게 “당신은 애국자요, 영걸의 인물로서 국가에 속한 사람이니,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대로 마음 놓고 활동하시오”라며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이후 이혜련 여사는 1905년 미주 이민가족 중 최초로 태어난 아들 필립을 키우면서도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줄 수가 없어, 백인가정에서 얻어온 여자 옷을 입혀왔음은 당시 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도산이 고국에서 동분서주하고, 그리고 다시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활동에 매진하는 동안에도 이혜련 여사는 병원에서 조리사로 일하고, 백인집의 세탁물을 빨래하면서 돈벌이를 해야 했다.
이 무렵 신민회 동지인 이갑이 러시아에서 중병으로 고생을 할 때, 미국으 로 초빙하기도 하고, 시베리아에서 치료받게 하는 등의 경비를 위해 1천 불 정도의 비용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 돈은 이혜련 여사가 삯바느질과 빨래를 하며 틈틈이 모은 돈으로, 남편의 동지를 위해 담대하게 내놓은 것인데, 이 돈을 받은 이갑은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1913년에는 도산이 LA에서 ‘흥사단’을 창립하게 되는데 단소 건물 1층 한구석에 가족들의 공간을 마련하고는 가정과 흥사단의 일을 동일시하면서 방문자들을 대접하기를 소홀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드나드는 손님과 동지들의 식비 마련을 위해 이혜련 여사는 부유한 백인들의 집을 밤낮으로 청소하고, 세탁하고, 바느질을 하거나 요리를 해 주면서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이다.
한편 한인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 미래세대의 인재양성을 위해 1916년 클래어몬트 ‘한인양성소’가 설립되고, 유년하기국어강습소가 개학했을 때는 흥사단이 앞장서서 봉사를 했는데, 맏아들 필립을 제일 먼저 입학시키는 등 민족교육과 민주시민 교육에도 전념하였다.
그리고 미주 여성들의 단결과 독립운동을 위해 솔선수범하기도 했는데, 3·1운동 당시 ‘LA대한부인친애회’에서 독립의연금 모금에 심혈을 기울였고, ‘대한여자애국단’이 창단되고 난 이후에도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대표의연, 독립의연, 이십일례금, 애국금, 공채금, 인구세 등의 모금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미국 적십자사 LA지부의 회원으로도 가입하여 상해의 대한적십자회와 여자애국단과 연락하고, 국내에 비밀결사로 결성된 대한적십자회와 여자애국단과도 조직적으로 연대하였고,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쟁구호품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이혜련 여사에게 1926년 도산이 상해로 다시 떠나면서 한 송별사에서
“나는 평생을 통해 당신에게 치마 한 감, 저고리 한 채를 사줘보지도 못한 남편이요, 부족한 남편이요. ··· 나는 너희들이 소학에 다니고 중학을 졸업하는 동안에도 연필 한 자루 공책 한 권 사줘 본 적이 없다. 부족한 애비다”
라고 했을 때, 참석한 모든 이들을 숙연하게 했다는 얘기를 보면, 남편 대신 5남매를 키우며 살아온 이혜련 여사의 억척같은 삶이 눈에 선하다.
1932년 윤봉길 의거로 도산이 체포되고, 1937년에는 일제가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도산을 다시 체포한 후, 고문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도, 이혜련 여사는 꿋꿋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중일전쟁 때 부상병 돕기 운동, 일화배척운동, 광복군 후원금 보내기 운동 등을 통해 대일항전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활동들을 통해 재미한인의 대모로서, 1969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평생을 주체적으로 살아왔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혜련 여사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의 희생과 투쟁에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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