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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제2독립선언서를 준비한 대동단의 이신애 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3.21 20:42 수정 2019.03.21 20:42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과 1919년의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여성 활동가들의 적극적인 활약은 우리사회에 ‘여권’이 뿌리내리는 데 기본 토양이 됐다. 즉, 이러한 활동에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정당한 여성의 몫’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실히 다져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남녀평등 원칙을 명시하였고, 이후 건국강령에서 여성 참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당시는 미국이나 영국 등 소위 선진국도 여성참정권을 얻지 못했던 시기였으므로 이는 세계사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대동단원으로 활동하며 제2독립선언서를 준비한 이신애 여사를 통해 남녀평등의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 가고자 했던 당시 선각자들의 모습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이신애 여사는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 홀어머니를 따라 원산으로 이주, 원산소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후 개성 미리흠여학교에 입학했다. 1914년 원산의 성경여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기독교 전도사로서 활동하던 중, 부흥회에서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여사의 삶은 사실상 손정도 목사를 만나고 나서 180도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손정도 목사는 1912년 하얼빈에서 일본 수상 가쓰라다로의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진도에 유배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의용단 조직, 흥사단 활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한 분으로서, 평소 목회 강연에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소개하는 등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북돋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감복을 받은 이신애 여사는 민족독립을 위해 일할 것을 약속하고 결사 선서를 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2월 28일 3·1만세운동에 참여하라는 ‘지급상경’ 전보를 받고 서울에 도착,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혈성단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3·1운동으로 수감된 민족운동가들과 그 가족들의 생활 구제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원산을 오가며 군자금 모집에 온 힘을 쏟아 부었고, 1919년 9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강우규 열사를 숨겨주기도 했다.
1919년 6월 30일 이신애 여사는 “죽을 땐 입 없이 죽겠다”고 결사 서약을 한 후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이 조선민족대동단은 3·1운동이 그 열매를 맺지 못함을 통분하던 지사 전협과 최익환 등이 4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한 후, 의친왕 이강을 고문으로,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하여 1919년 4월 비밀리에 발족시킨 단체였다.
이신애 여사는 이 대동단에서 부인단총대에 선출된 후 크게 세 가지 방면에서 항일 활동을 주도했다. 첫째는 지하문서 제작과 배포였는데, 파리강화회의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진정서를 작성하고, ‘일본 국민에게 경고함’이라는 문서와 경고문 등 수천 매를 제작·배포하였다.
둘째는 상해 임시정부 리더인 안창호의 동의를 얻어 김가진과 이강, 박영효, 김윤식 등의 지도자들을 상해로 망명시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강을 탈출시키는 과정 중 중국 안동역에서 발각되는 바람에 전협 등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세 번째는 상해 임시정부의 특파원 이종욱 등과 연계해 제2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벌이는 일이었다. 이강의 망명 사건 때 경찰의 체포 망에서 겨우 벗어난 이신애 여사와 나창헌 등은 이후 만세운동을 다시 추진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의친왕 이강과 여성대표 이신애 여사 등 33명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서명을 받고, 11월 28일 오후 5시 경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안국동 경찰관 주재소 앞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제2독립선언서에는 “반만 년 역사의 권위와 2천만 민중의 성충을 의지하여 국가의 독립 됨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 됨을 천하만국에 선언하며 또한 증언하노라. (중략) 불평하여 외치면 강도로 다스려 찢어죽이니 범부의 충의의 혼이 잔인한 칼 아래 쓰러진 자가 몇 천 몇 만인가. (중략) 만일 일본이 끝내 뉘우침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 1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혈전을 불사코자 이에 선언하노라”라며 기미독립선언서의 각오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이 제2독립선언서에는 기존 2·8독립선언서와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없던 여성, 즉 이신애 여사와 한일호, 박정선 등 여성 3명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대동단의 독립선언서는 신분, 계층, 성별을 총망라하여 민족의 대동단결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이 사건으로 이신애 여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여기에서도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일을 맞아 유관순 등과 함께 형무소가 떠나가도록 만세소리를 드높이다가 고막이 파열되는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이신애 여사는 1925년 가출옥 후에도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에 매진하였고, 광복 후에도 다양한 여성계몽운동을 주도했으나, 안타깝게도 이후 궁핍한 생활만 유지하다가 1982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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