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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창호도 아꼈던, 선천 3·1만세운동 이끈 차경신 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4.09 20:41 수정 2019.04.09 20:41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악랄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각종각양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목숨과 삶을 바쳤다. 이러한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의와 용기를 가진 수많은 여성들도 있었는데, 평북 선천 출신의 차경신 여사 또한 그 분들 중 한 분이다.
차경신 여사는 1892년 평북 선천에서 3대 독자인 차기원의 여섯 딸 중 맏딸로 태어났다.
차경신의 어머니인 박신원은 맏딸을 진취적이고 용기 있는 자세로 참다운 삶을 살도록 교육을 시켰으며, 또한 차경신이 태어난 선천지역의 특성상 의주와 평양이 가까운 관계로 개신교 선교사들과의 접촉이 용이하여, 이로 인해 신문물에도 일찍 눈을 뜰 수 있었다.
이러한 교육과 환경의 영향으로 차경신 여사는 1910년 보성여학교에서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여 평북 강계에서 4년 동안의 교사생활을 할 수 있었고, 1915년에는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의 영생여학교 교사로 근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일찍부터 교육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결혼 같은 것은 관심이 없었고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에만 염두에 두고 살았다.
그러던 중 신학 공부를 통해 더 많은 역할을 하고자 당시 남자들도 마음먹기 어려운 일본의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유학 과정에서 일본 횡빈신학교의 한국 유학생들과의 교류는 차경신 여사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곧 정신여학교 선배인 김마리아를 만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한 몸을 바칠 것을 결의하였던 것이다.
마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 의한 약소민족의 독립을 옹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일본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을 하고 이 분위기를 국내로 연계시켜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다. 이때 차경신 여사는 김마리아의 권유로 여성계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부친 장례를 핑계로 국내로 잠입하게 된다.
동경을 출발, 부산·대구를 거쳐 영천에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애국금을 모집하였고 서울에서 함태영 목사를 만나 여성계의 3·1운동 참여에 관해 논의하였다. 아울러 함 목사의 부탁으로 고향 선천으로 가서 거사를 준비하라는 책무를 맡게 되었다. 선천에서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차경신 여사는 일본 여인 옷인 하카마를 입고 그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각 요소에 전달하였다.
한편 차경신 여사는 신성학교, 보성학교의 믿을 만한 동지들과 교회계 유지들을 자신의 집에 모이게 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게 했다. 또한 선천 청년들 50여 명을 모아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고, 보성여학교 동창들로 하여금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으게 하는 등 3·1만세운동의 거사를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3월 1일 당일에 지방에서는 드물게 선도적으로 독립선언을 수행할 수 있었다.
선천의 3·1만세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일경에서는 차경신 여사 체포령을 내렸다. 차경신 여사는 신변이 위태로워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밀행하면서 독립전쟁을 위한 간호대를 조직하여 붕대, 가위 등을 마련하고는 의주로 들어갔다. 의주에서는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청년을 규합하여 대일항전 준비를 몸소 수행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국내외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년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심일체의 통일적인 대한청년단연합회를 발족하게 되는데, 이때 18명 발기인 중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차경신 여사의 성명이 올랐다. 이 연합회는 중국 홍통구의 중국인 농가에 본부를 두고 임시정부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비밀리에 운영되었는데, 차경신 여사는 김승만과 함께 조직의 핵심인 총무의 직임을 맞아 연합회의 규모를 3천여 명으로 늘렸다.
이러한 차경선의 활약 등에 왜경은 발본색원하고자 밤낮없이 홍통구를 습격하여 쑥대밭이 될 지경에 이르자, 차경신 여사는 이를 피해 밤이면 산에 올라가 섭나무 잎으로 성을 쌓고 잔디밭에 몸을 던져 차디찬 돌베개를 베어야 했다. 또 어떤 때는 산골짜기 1칸 초옥 속에서 짐승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차경신 여사는 굶주림과 풍찬노숙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상해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안창호의 도움을 받아 병원비를 마련하여 겨우 몸을 추스르고, 미국에 가 있던 독립운동의 선배이자 동지인 김마리아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곳에서 다시 안창호의 소개로 박재형과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미국에서 교포2세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대한여자애국단에 가입하여 단장, 서기로도 활동하였으며, 중일전쟁 중에는 중국군을 위한 후원금 모집,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미국적십자 사업을 후원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여성인물은 그저 제도에 순응하고 고즈넉하게 살지 않았다. 차경신 여사 역시 어려운 일제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순응적인 삶을 살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모험적인 인생을 산, 두고두고 기려야 할 위인이었던 것이다. 1978년 86세의 일기로 명을 다할 때까지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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