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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초임교(初任校)의 추억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4.10 20:47 수정 2019.04.10 20:47

김 시 종 시인·자문위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필자는 무시험으로 특혜 발령을 받는 것은 달갑지 않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짜릿한 기분으로 시험을 통과하여 발령 받는 것이 떳떳하고 더욱 기분을 북돋아 준다는 생각이 든다.
중등학교 역사과 교사는 자격증을 취득하고 적어도 8년은 썩어야(?) 발령을 받는 다는 징크스를 깨고, 1969년 12월 27일 문교부 시행 중등준교사자격고시검정에 합격, 경북도교육청 임용고시에 응시한 36명 중 3등으로 합격하여 자격증 취득한지 2개월 만에 중등교사로 정식임용이 되었다.
1970년 3월 1일자로 문경시 가은중학교 교사로 첫 발령이 나, 미리 인사하러 간다고 3일전에 착임신고를 하게 되었다. 학교는 당시 봄방학 중이고 늦은 오후가 되어, 그 날 일직 한 사람이 난로불을 뒤적이고 있었다. 양복도 아닌 추레한 옷차림하며, 이발한지 오래된 듯 수염이 길게 자라고 머리칼도 헝클어져 학교용인(기능직)으로 쉽사리 인식이 되었다. 그 분은 난롯가에서 일본어로 된 전문서적을 보고 있어, 보통이 넘는 화상임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날 처음 만난 노(老)교사는 오십대 후반의 늙은 수학교사 유춘선(柳春善) 선생님이었다.
첫 인상으로도 직감했지만 유 선생님은 성질이 좀 별나고 지난날의 경력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유 선생님은 일제시대 조선인들이 선망하는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 전신) 섬유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인으로 경성고등공업학교 입시에 합격하면 당시 최고신문 동아일보에 보도될 정도로 조선학생으로서는 대단한 쾌거였다. 유춘선은 해방직후 경찰간부후보생 1기로 공모에 합격하여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경위로 임관되었다. 당시 경위 모자에는 금테를 둘렀고, 사람들이 여간 부러워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해방정국에서 서울에 발령을 받아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격무에 시달리게 되었다. 좌우의 격렬한 대립으로 경찰관이 테러 당하고 살해되는 불상사도 잦았다고 했다.
유춘선 경위가 근무하는 종로경찰서는 경무부(경찰청)의 수도청(서울시경)에 속했다. 당시 수도청장은 반공정신이 막강한 장택상이었다. 장택상의 아버지 장관찰은 조선 말기 경상도 감사였다. 수도청의 직속상급기관은 경무부인데, 조병옥이 경무부장이었다. 조병옥 경무부장도 투철한 우익인사로 공산당이 준동하는 남한의 치안책임자로 더 할 수 없는 적임자라 할 수 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좌우충돌은 그칠 줄 몰랐고, 민간인들뿐 아니라 경찰관들도 시국에 위기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 이직하는 이들도 속출했다. 유춘선 경위는 종로 어느 파출소장으로 근무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유 경위는 머리가 좋을 뿐 아니라 성격도 불같은 점이 있어, 보기에 따라 무골이 적격일 것 같지만 눈에 거슬리는 일은 좀채로 참지 못했다.
당시 유 경위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이 있었다. 서슬이 퍼런 장택상 수도청장의 아들(서자)이 말을 타고 거들먹거리며 파출소와 경찰초소를 종횡으로 누비고 다녔다. ‘근무 똑바로 하라’고 큰소리치며 거드름을 피웠다. 유춘선 경위는 장택상 청정 아들의 발호에 일격을 가할 결심을 하고, 초소에 야구방망이를 숨겨 놓았다. 유 경위의 작심을 눈치 채지 못한 장 청장 아들(서자)은 그 날도 기고만장하게 굴다가, 야구배트를 재빠르게 들고 나타난 유 경위가 다짜고짜 말 주둥이를 호되게 내려쳐서 말이 놀라 나자빠지고 장 청장 아들은 중대 낙마상을 입고 말았다.
유 경위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면 한방 먹여야 직성이 풀렸다. 독자제현들이 익히 아시는 대로, 장택상 수도청장은 보통화상이 아니었다. 기백도 있고, 두뇌회전도 빨라, 그의 유머와 위트는 한국정객들 중에서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다.
유 경위는 기마기습사건 이후 김구 선생의 숙소인 경교장초소장으로 전근발령이 났다. 얼마 후 상부로부터 경비전화가 걸려왔다. ‘김구 선생이 지금 경교장에 있느냐’는 확인 전화였는데, ‘이상 없이 잘 계신다’고 보고하니, ‘잘 있는 거 좋아하네. 김구 선생은 어제 38선을 넘어 평양에 갔다고 했다. 김구 선생은 신출귀몰하여 월장을 곧잘 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유 경위는 직무태만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고, 상급자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공산도배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 지긋지긋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금테 모자를 자진 반납했다. 그 후 중등교사로 진출하여 대구시내 학교 교사를 거쳐 시골인 문경군(당시) 가은중학교 교사로 순환근무를 하시게 된 것이다.
유 선생은 비판정신이 강하고 교사로서는 비주류였지만, ‘학생상담’에 조예가 있고 관심이 깊으셨다. 필자는 김구 선생도, 장택상 수도청장(훗날 국무총리)도 직접은 못 봤지만, 이 분들과 지근에서 계셨던 유춘선 선생님을 초임지 가은중학교에서 만난 것은 길이 간직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 확신한다. 역사의 산증인의 곁에서 직장생활을 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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