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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어떤 師弟同行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4.17 20:50 수정 2019.04.17 20:50

김 시 종 시인·자문위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제발 제자와 만나지만 말았으면…. K 대학캠퍼스를 들어서자, 많은 학생들이 좌우에 도열해 있었지만 다행히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혹시나가 역시나로 되었다.
20년 전 중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 S군이 나보다 먼저 도착,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에게 가까이 와 깍듯이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20년 전에 내게 배운 제자가 오늘부터 스승과 제자가 아닌 방통대 학우가 된 것이다.
내 인생에 재앙은 가난이었다. 돈만 있으면 국립 S대를 제외하곤 거의 들어갈 수 있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것도 은사(恩師)이신 이대성 선생님께서, 아버지가 안 계신 불우하고 가난한 학생이라 하여, 3년간 계속 공납금을 특별히 면제하여 주셔서 어렵게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까스로 손에 쥐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바쁘게, 그 동안 진 빚 때문에 오막살이마저 날리게 되어, 오기로 육군에 지원입대를 했다. 군을 제대하고는 취직이 하늘의 별따기라, 급한 김에 교육대학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간신히 졸업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내 인생을 끝마칠 수 없다는 각오를 하느님이 귀엽게 보셨던지, 문교부에서 실시하는 중등교사자격시험에 응시, 단번에 합격하여, 중학교 교사로 이태 되던 해, M 중학교에서 S군을 가르치게 되었다. 중학생 때는 별로 두각을 못 드러내던 S군이 지방전문대를 졸업하고, 어려운 경상북도 7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여세를 몰아 방송대 법학과 3학년에 편입하여, 지난날의 師弟가 학우(學友)로 돌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방송대 협력학교인 K대학교 법대학장님이, 비록 학교는 다르지만 나와 같은 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한민국 고등학교 동기생이다.
법대 학장님도 내 제자였다가 학우가 된, S군과 성이 같은 S학장님이다. S학장님의 집은 지역의 재력가인 양조장집이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10대의 가난이 40대 후반까지 내겐 연장이 되어, 45세 나이에, 남들은 대학 학장을 하네, 총장을 하네 하는데, 겨우 방송대 3학년생의 늦깎이로 새카만 제자와 맞수가 된 것이다.
뒤늦게 방송대생이 된 것은,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방송대학생모임에서 나를 검정고시를 통과한 입지전적(立志傳的)교사라고 초빙한 것이 빌미가 되어 나마저 만학생이 된 것이다. 제발 방통대 그만두고, 차라리 그 힘 들여 연구점수를 따서 교감이나 일찍 되라는 충고도 수없이 들었다. 제자와 동기생이 된 것도 아무리 겉으론 초연한 척해도 조금은 부끄러운데다, 그만둘까 하다가도, 젊은 교사 K의 말이 생각나, 어떤 일이 있어도 통대를 마쳐, 학사 학위를 따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K 뿐 아니다. 젊은 교사들은 툭하면 4년제 대학 졸업한 처지에 겨우 말단 교사하게 됐느냐고 말하지만, 대학 못 나오고 교사하는 나에게 들으라고 하는 언중유골(言中有骨)로 들렸다. 제자 S와 사제와 학우의 관계를 묘하게 유지하면서, 두 학기를 보냈다. 젊은 학우들도 학점을 날려, 쌍권총(2F학점)을 찬 서부 건맨(?)들이 속출했지만, 내 경우 별로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학점을 모조리 다 획득하여 만학의 보람을 그런대로 느꼈다.
4학년 1학기 등록을 마쳤을 때, 제자 S군이 찾아와, “저는 이번 경기도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앞으로 강의실에서 선생님을 못 뵙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연유로 학우관계가 다시 사제관계로 환원이 되었다.
“S군, 그 동안 마음고생이 많았지. 못난 스승 덕분에 담배도 마음대로 못 피우고, 부디 그 곳에 가서도 통대를 놓지 말고, 나와 대학동창이 되어야 하네. 한번 동창은 영원한 동창이란 사실을 잊지 말게”
나와 S군은 서로 손을 굳게 잡은 채 한참 놓을 줄 몰랐다.
아무리 배움에는 노소(老少)가 없다지만, 경칭을 생략한 채, 손XX, 김XX! 하고 교수님이 출석호명을 할 때는 교도소 죄수처럼 조금은 서러웠다. 어느 새 만학의 보람으로 법학사가 된 지도 만 32년이 넘었고, 교사에서 교감, 교장으로 승진도 했다. 뒤늦게나마 학사가 되었기에, 학사인 부하직원들을 떳떳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제자 S군, 아니다 학우 S씨의 근황이 궁금할 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여자에게, 여고시절이 얼마나 소중했으면 중졸밖에 못한 이미자 씨의 있지도 않은 여고시절이 각색되어 있겠는가!
우상숭배 반대로 일제 때 혹독하게 탄압을 받던 기독교 모 교파의 독실한 여자집사가 외손자 대입합격을 빌기 위하여 팔공산 갓 바위에 절하는 장면이 TV화면에 우연히 포착되어, 참새들의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다. 한 마리 새가 폭풍을 거스를 수 없듯이, 전 국민에게 만연한 대학 열병의 회오리를 벗어날 수 없어, 나도 캠퍼스의 늦깎이가 됐지만, 나이 들어 외아들을 낳은 것처럼 학사모의 무게를 더욱 실감 있게 느꼈다.
제자 S군과 동창생이 된 것도 이젠 아픔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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