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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상해 임시정부의 내조자 김순애 선생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5.19 20:36 수정 2019.05.19 20:36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국가보훈처가 금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규식, 김순애 부부를 소개하고 있다. 이 중 김순애 선생에 대해서는 “남편 김규식은···(중략) 부인 김순애는 1919년 상해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 회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후략)”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듯 남편 김규식을 먼저 언급하고 ‘부인 김순애는···’이라고 시작하는 것은 아직도 여성의 독립운동이 그렇게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김순애 선생은 일찍부터 여성 지도자로서의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한 상태로 독립운동을 해 왔음에도 말이다.
김순애 선생은 1889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일명 소래(솔내)마을에서 아버지 김성섬과 어머니 안성은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래마을은 일찍부터 개화된 지역으로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로도 불린다. 이곳에서 만석꾼의 딸로 자란 김순애 선생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설립된 소래학교에 입학하여 조카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김마리아와 함께 신식교육을 받았다.
김마리아 외에도 그의 집안을 보면 둘째 오빠 김윤오, 셋째 오빠 김필순, 김필순의 자녀 김덕홍, 김위, 김로, 여동생 김필례, 언니 김구례의 아들 서재현 등 온통 대를 이어 독립운동의 전통을 이어 간 가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901년에 서울에 와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집은 애국지사들의 우국충정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고, 안창호 등 애국지사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민족과 나라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또한 정신여학교의 전신인 연동여자중학교에 입학하여, 선교학교임에도 민족교육을 중심에 둔 교육 방침에 맞게, 한국여성을 일깨워야 한다는 역사적 책임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09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부임해서는 일제의 눈을 피해 학생들에게 한국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순애 선생의 이러한 구국활동은 일제경찰에 발각되어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역시 안창호를 도와 신민회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105인 사건에 연루된 오빠 김필순을 따라 1912년에 중국 통화로 망명하였다.
1915년에는 난징의 명덕여자학원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유창한 영어와 중국어 구사능력을 배양하여 후일 독립운동현장에서 국제적 지원을 받는 데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이 무렵 오빠 김필순의 심부름을 도맡아 형부인 서병호와 독립운동을 하던 김규식에게 독립자금이나 편지를 몰래 전하곤 했는데, 이를 인연으로 1919년 김규식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 망명지에서의 결혼은 운명적이면서도 뜻을 같이 하는 동지적 결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김규식이 신한청년당의 파리특사로 선정되자 부부가 같이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여, 김규식은 파리로 가게 되었고, 김순애 선생은 국내 부산으로 잠입하여 서울, 평양 등지에서 파리강화회의 지원방안을 논의하였다.
국내에서의 신변위협을 느끼자 다시 내몽골의 치치하얼로 피하여 헤이룽장 국립여자사범학교 학감으로 취직하였다. 여기에서 3·1운동과 같은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다가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자, 중국 국적임을 내세워, “너희들이 타국인의 인권을 이렇게 유린할 수 있느냐?”며 오히려 반격을 가하고, 풀려나자마자 상해로 탈출하고 말았다.
상해에서는 당시 임시정부 지원에 필요한 군자금 확보와 임시정부의 각종 포고문을 국내에 배포하는 일이 시급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 국내에서 애국부인회가 만들어지자 상해에서도 대한애국부인회가 결성되었는데 김순애 선생이 그 대표를 맡아 “우리는 남자의 부속물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이다. 여성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자득하여 결사조직을 한 것이다”라며 여성운동의 역량을 통합하려고 애썼다.
1919년 8월에는 안창호 등과 협의하여 임시정부 내에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하여 사검, 이사로 활동하였고, 1920년 1월에는 여성임에도 손정도, 김철, 김립, 김구 등과 무장투쟁 성격의 의용단 조직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11월에는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의 의원으로 피선되어, 독립운동가들의 옷 세탁, 삯바느질은 물론 하숙도 치고, 와이셔츠 공장도 경영하면서 임시정부 운영에 필요한 자금염출에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리고 1926년에는 안창호 등과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창립을 주도하여 법정인구세 납입운동 등 재정지원에 최선을 다했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산하에 김두봉의 부인 조봉원과 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3·1운동기념일에 항일격문을 살포하는 등의 활동에 앞장섰다. 1932년 윤봉길 의거로 임시정부의 활동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김순애 선생은 1943년에 유력단체였던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결성하고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이렇듯 김순애 선생은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김규식의 남편이 아니라 당당한 대한민국의 여성으로서, 다양한 지원단체의 결성과 활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면서 적극적인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해방 후에는 김규식이 한국전쟁 때 납북으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1976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야 김순애 여사의 활동이 그 빛을 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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