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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임시정부 지킴이 연미당 선생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5.23 20:34 수정 2019.05.23 20:34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해외에서 전개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특징은 독립운동가인 부친이나 남편을 돕다가, 아니면 독립운동가인 아들, 딸을 키우는 과정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여성의 독립운동이 당당한 주역으로 평가받고 싶어도, 사회 분위기상 여성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러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분이 바로 연미당 선생이다.
연미당 선생은 충북 증평 출신 독립운동가 연병환의 딸이다. 아버지 연병환은 구한말 관립외국어학교 영어학교를 졸업한 덕분에 유창한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을사늑약 이후 국내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07년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만세운동의 숨은 조력자로 알려져 있는 분이다.
1908년 중국 용정에서 태어난 연미당 선생은 아버지와 삼촌들의 독립운동을 보고 자랐다. 당시 용정촌의 연병환 집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의논하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제가 눈엣가시인 연병환을 조선아편단속령으로 체포하게 되자 가족이 상해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연미당 선생은 거기에서 상해정부 공립학교인 인성학교에서 초등과정을 졸업하고, 진강으로 이주해서는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다.
부친이 별세한 후 상해로 돌아온 연미당 선생은 19세인 1927년에 엄항섭과 결혼하였다. 당시 엄항섭은 22세였는데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에 능통하여 프랑스 조계 공무국에 근무하면서, 김구를 적극적으로 도와 임시정부의 활동에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연미당 선생은 임시정부와 평생을 함께 하며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는 데 전심을 다했다.
상해에서의 여성들의 역할은 다양했다. 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복무하는 남편을 위해 내조하며 자녀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그러나 남편을 따르고 가정을 지키는 아녀자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계를 위해서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독립운동계 여성들은 독립운동의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자그마한 힘이 독립운동이 지속가능하도록,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였으며, 일제가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남성들과 대등한 독립운동투사로 활약하였다.
상해에서 좌우익의 분열이 극에 달해 임시정부가 파행의 위기에 직면했을 1930년에 연미당 선생은 한인여자청년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다. 여자청년동맹은 한국독립당의 여자청년단체로서 임시정부와 교민단이 주관하는 3·1절기념행사나 8·29국치기념일 등 각종 기념일 회의 진행과 운영을 맡아 행사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주관하였다.
1932년에는 22살의 나이로 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 5명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상해 청년여자교민에 대한 조사 및 상해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들의 단합을 위하여 활동하였고, 3·1운동기념일에는 항일 격문과 전단을 제작·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한중간에 갈등이 생기자 대일 공동투쟁을 위한 한중통일전선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한인애국단에서 윤봉길과 같이 활동했던 엄항섭도 상해를 탈출해야 했다. 따라서 연미당 선생 또한 임시정부를 따라 난징, 광저우, 충칭 등으로 8천㎞ 대장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연미당 선생은 폐결핵에 걸려 각혈하는 이동녕 선생을 극진히 간호했으며, 장사의 남목청에서 김구가 저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을 때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와서 회복할 때까지 간호하였다. 또한 1938년 안창호 서거 소식을 듣고는 임시정부 차원에서 성대하게 추도회를 가졌는데 추도식장이 비분강개와 눈물바다로 가득 찰 정도로 준비한 것은 모두 연미당 선생이었다.
이처럼 연미당 선생을 비롯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자녀들의 교육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옷 세탁을 책임지고, 삯바느질을 하며 돈을 벌어 사실상 가장의 역할을 다 해냈던 것이다.
1937년 한인청년들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한일전선구축에 나서자, 연미당 선생 부부도 여기에 참여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이 되어 대일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하였다.
1940년 이후는 임시정부의 임시수도인 중경에서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해서 조직부 주임을 맡아 ‘전민족 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중국의 중경방송을 통해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담당하였는데, 임시정부의 활동상황과 중국에서의 일본군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 동포들에게 널리 알렸다.
또한 일본군 내의 한국군들이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초모활동을 하였고, 일본군포로수용소를 찾아가 한국인들이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도록 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하지만 해방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남편 엄항섭이 납북되자 연미당 선생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주목받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안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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