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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13살에 九松결사대로 독립운동 시작한 전창신 열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6.02 19:12 수정 2019.06.02 19:12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목숨을 내놓고 대한독립을 외친 의인들과 독립운동가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 것에 감사를 드린다. 특히 3·1운동 당시 수많은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길거리에서, 학교에서, 장터에서 만세운동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3·1운동기념사업회 자료에 따르면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만 106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중 해방 후 인천 여성경찰서장을 지낸 전창신 열사를 소개해 본다. 전창신 열사는 1900년 함남 용대에서 독립운동가 전원규의 맏딸로 태어났다. 1908년에는 성진으로 이사하여 선교사가 세운 성진보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10년 합방을 전후한 당시 성진의 교회는 일제에 대한 울분을 터뜨리는 애국지사의 온상이었다.
전창신 열사는 열세 살 되는 1912년에 12세에서 16세에 걸친 9명의 보신여학교 학생들과 한일합방 후 최초로 구송(九松)결사대를 조직하여 성진지역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9명의 보신여학교 학생들은 중국의 여자혁명군 오숙경 등 결사대 이야기에 고무되어 절개와 기상을 의미하는 ‘송(松)’자를 넣어 구송회라는 비밀결사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구송회는 애국충정을 높이기 위해 충신열사들의 인물공부, 일본과 청국과의 관계, 박제상·홍익한·윤집·을지문덕 등 위인들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그리고 장차 북만주로 가 독립군에 가담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국권회복에 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약속하며 신체단련을 위한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6년에는 함흥으로 가서 함흥영생여학교 고등과와 보습과를 졸업하고는 1918년에 함흥영생여고 보통과 교사로 특채되었다. 함흥영생여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던 1919년 3·1운동을 맞아 후에 남편이 되는 김기섭 목사와 함께 함흥지방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2월 28일 저녁 함흥교회 목사, 장로, 영신소학교와 영생학교 남녀직원, 그리고 민족주의자로 소문난 허헌 변호사 등 42명이 모여 3월 3일 거사를 기획했다. 이 중 전창신 열사를 포함한 단 2명의 여성은 여자 동원, 태극기 준비, 연락, 간호, 뒤처리, 거사 후 수감자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책임지기로 했다.
거사 당일이 되자 인근 각촌에서 새벽부터 올라온 군중은 큰장 거리에 운집했고, 세브란스의대에 재학중인 최명학의 나팔소리를 신호로, 연대에 재학중인 김기섭이 초가집 지붕에 올라 만세삼창으로 분위기를 고조하자, 시가행진이 시작되었다. 시내는 이내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로 가득 찼고, 일제는 무서운 총칼로 강제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만세시위의 위세는 그칠 줄 모르고 인근 각처 농촌으로 번져나가 2주간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
일제는 급기야 여학생들을 체포해 머리를 불갈고리로 찍어 피로 물들였으며, 어린 남학생들은 형틀에 묶어 발가벗긴 엉덩이의 살점이 떨어져나가도록 태형을 가했다. 마침내 휴교령이 내려지고 주모자 42인이 거의 다 체포되면서 전창신 열사도 구속되었다. 감방에는 어린 학생들의 곤장 맞는 비명소리로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나라 없는 국민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가를 뼈저리게 느끼는 장면이었다.
전창신 열사는 취조를 맡은 조선인 고등계형사 이계한을 마주 보고,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지금 삼천만 민족이 총칼 앞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피 끓는 청년 남아로 태어난 당신은 고작 하는 말이 그거요?” 하며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결국 42명 전원은 6개월에서 2년까지 징역형을 받았는데 전창신 열사는 8개월의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옥살이 도중에도 민정시찰 차 감옥을 찾은 동경 고등법원장에게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외치며 “내가 왜 이렇게 인간 이하의 비참한 꼴로 나타났겠소? 다 나라를 빼앗긴 탓이오. 축생 이하의 대우를 받아 죽어도, 나를 보호할 나라가 없단 말이오. 우리는 꼭 독립하고야 말 것이오”라며 나무랐다. 이 소문은 재빨리 함흥에 퍼졌고, 교회에서는 전창신 열사를 영웅이라며 야단들이었다고 한다.
1919년 12월 출옥을 한 전창신 열사는 일본 동경 동양 영화여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거기서 학사학위를 마치고는 교사자격증을 쥐고 1922년에 본인의 모교인 영생보통학교 교사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간악한 탄압을 통해 3·1운동 주모자를 교사로 채용할 수 없다며 정식 채용을 하지 않는 바람에 20여 년간 인가 없는 교원생활을 해야 했다.
1924년에는 3·1운동 동지였던 김기섭과 결혼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듯했으나 남편의 사업실패로 모든 빚을 책임지게 되자 아이들과 함께 힘든 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후에도 남편 김기섭은 신사참배 반대 죄목으로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아야 했고, 전창신 열사는 없는 형편에 남편 옥바라지까지 하느라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45년 드디어 해방. 하지만 기쁨도 잠시, 거지 떼 같은 소련 병정들은 집집마다 노략질하기에 바빴고, 먹고 살기에는 해방 전과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월남을 감행하고는, 인천에서 최초의 여성경찰서장이 되어 자유대한에 봉사를 잠시 하기도 했다. 여생은 교회 일과 3·1운동기념사업을 하다가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이렇게 또 한 분의 여성독립운동 열사가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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