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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노후, 연대의 근육을 키우자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6.03 20:42 수정 2019.06.03 20:42

김 경 록 소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얼마 전 저희 연구소 칼럼니스트인 김욱 작가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올해 90세인 작가는, 젊어 직장에 다닐 때는 원수 같고 지겹던 곳이 가끔씩 너무 그리워집니다. 은퇴를 하고 나니 함께 일을 했던 커뮤니티의 상실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옛 커뮤니티가 그리워 단골로 다니던 직장 근처 칼국수 집을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봅니다. 모르는 후배들이 훨씬 많고 몇몇 아는 얼굴도 있지만 차마 인사를 못하고 도망치듯 나와 한참을 걷다 잘 모르는 동네의 칼국수 집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혼자 칼국수를 시켜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습니다.
이 글의 장면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 미래 나의 모습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직장에서 맺었던 연대(連帶)가 사라지고, 이를 대신할 무엇을 노후에 발견하지 못한 채, 허전하고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아노미(anomie) 상태에 빠진 모습입니다.
아노미는 신의 뜻도 법도 없는 상태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노미아(anomia)에서 비롯된 말로, 어떤 규제도 받지 않고 새로운 규범도 없어서 혼란스러운 상태를 말합니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의 규제와 규칙이 느슨해지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아노미 상태에 빠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규제와 규칙이 느슨해지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개인도 은퇴를 하면 규제와 규칙으로부터 느슨해집니다. 직장이 주는 압박과 규제,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는 압박도 없어지고 자유로워집니다. 내가 관련되었던 연대들이 해체되는 셈입니다. 노후에 연대감을 상실하고 아노미 상태에 빠지기 쉬운 이유입니다.
노후의 무연대(無連帶)에 대처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규제와 규칙을 스스로 만듭니다. 직장이 없을 때 양복을 입고 출근 시간에 방을 나와 거실로 출근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자신의 생활 환경이 자유로운 대신 스스로 엄격한 규칙의 틀 속에 자신을 둡니다. 일정한 스케줄을 지키고 조깅, 수영, 음악감상, 글 쓰기 등을 매일 규칙적으로 합니다. 학교를 나가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혼자서도 밥을 잘 먹고 잘 노는 고독력을 키우는 방법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고 노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독력을 키우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선승(禪僧)이나 수도자에게 가능한 경지입니다. 친구가 기러기 아빠로 2년 정도 혼자 지낸 적이 있습니다. 직장 갔다 집에 돌아와 맥주 마시며 TV 보는 게 주된 일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TV에 대놓고 중얼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러다 미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노후에 고독력을 키워야 합니다만, 이 초식(招式)은 불가피할 때 가끔 펼치는 것이지 일상적으로 즐겨 사용하다가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노후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연대를, 어떻게 강화해야 할까요? 우선, 가족의 연대입니다. 사회가 불안정해질수록 믿을 건 그래도 가족이라는 생각들이 싹틉니다. 자녀와의 관계, 배우자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입니다. 다만, 노후에는 자녀가 독립하고 배우자도 자신의 독자적인 삶을 찾고 싶어하기 때문에 과거 회귀가 능사가 아닙니다. ‘따로 또 같이’처럼 가족간의 적절한 거리로 중력 관계를 잘 설정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둘째, 친구와의 연대입니다. 여자들은 거주하는 공동체에서 연대를 형성하지만 남자는 학교 동창이나 친구 관계에서 연대를 형성합니다. 동창회 하러 다른 도시까지 가는 이유입니다. 오랜 친구를 만나면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보았을 때와 같은 즐거움을 뇌가 느낀다고 합니다. 젊어 직장 생활하느라 멀어졌던 친구와의 연대를 다시 이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먼저 연락을 하거나 모임에 나가는 것입니다.
셋째, 작은 커뮤니티들에서 연대를 찾습니다. 은퇴 후 직장이라는 큰 커뮤니티는 없어지지만 주변에 작은 커뮤니티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호회에서부터 봉사 활동이나 종교 활동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소셜네트워크에 커뮤니티들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60대 중반인 학교 선배님은 혼자 제주 올레길을 걷고, 모르는 사람 만나기 활동도 합니다. 페이스북을 통해 지인들과 활동을 공유하다 보니, 그 소식을 접한 지인들이 제주도로 날아가 함께 걷습니다. 카페 위치를 알려 놓고 처음 보게 될 사람을 무작정 기다리는 황당한 일도 벌입니다만, 신기하게도 꼭 한 명 이상은 모르는 사람이 그 선배님이 있는 카페로 찾아갑니다.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연대를 이어가는 걸 보게 됩니다.
넷째, 횡적 커뮤니티를 만듭니다. 젊을 때는 직장 안에서 커뮤니티가 종적으로 만들어집니다.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이 유기체처럼 조직을 형성하는 거죠. 이제는 자신의 전문성이나 취미를 가지고 다른 동업자를 찾아 횡적인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합니다. 한 직장의 연대가 아니라 같은 전문성이나 취미로서의 수평적 연대를 형성하는 겁니다.
은퇴 후 아노미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바람직한 것은 가족·친구·작은 커뮤니티·횡적 커뮤니티를 통해 연대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연금보다 근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관계들이 끊어지는 노후에는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 주는 연대의 근육을 잘 키워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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