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이겨낸 이은숙 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6.23 17:53 수정 2019.06.23 17:53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유명 남성 독립운동가들의 배우자들은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았고, 따라서 관련 자료도 부족하다. 더욱이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망명한 경우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사방을 떠도는 부군을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기다려야 했으며, 홀로 살림을 책임지고 꾸려나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독립운동가 남편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고생은 있는 대로 다한 것도 이들이었다.
우당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여사 또한 그러하였다. 명문 사대부인 아버지 이덕규와 어머니 남양 홍씨 슬하의 외동딸인 이은숙은 19세에 3남매가 딸린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결혼했다.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인내심을 갖고 가족들을 물심양면으로 보살피며 해외를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이은숙 여사의 인생이란 여느 독립운동가의 아내 못지않게 고난의 역경이었다.
이 여사는 우당과 결혼한 지 2년 만인 1910년 12월 서간도로 이주했다. 품에는 1년도 안 된 딸이 안겨 있었다. 남편 일가족과 함께 중국 지린성 유하현 삼원보로 집단 이주해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을 도왔다.
이는 해외에서 독립운동 터전을 일구겠다며 나선 것으로, 우당 등 6형제는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옮겨 와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이은숙 여사가 지난날을 회상하며 쓴 에세이집 ‘서간도 시종기’를 보면, 평상시 같으면 떵떵거리며 살아야 할 권문대가의 마나님이어야겠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 많던 재산 모두 독립운동에 다 바치고 하루 한 끼도 채우지 못 했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간도 시종기’는 이은숙 여사가 일제감정기를 주요 무대로 50여 년 동안 겪은 이러한 처절한 이야기를 기록한 수기이다. 참으로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대서사시인 것이다.
우당 이회영은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자신의 재산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군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은, 노블리스 오블리즈의 표상이다.
당시 처분한 재산이  약40만 원으로 현재 가치로는 약 600억 원이나 되는데, 이를 만주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라는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모두 다 써 버렸다. 이러하니 이은숙 여사에게는 안정적인 삶을 기대하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만주에서의 삶에 대한 표현을 보면 얼마나 삶이 곤궁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잘 해야 일중식(하루 한 끼만 먹음)을 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밥을 짓지 못함)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 하는 삶)로다” 라고 하였지만 매일 같이 방문하는 독립운동가들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이후 여사는 1919년 우당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옮겨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뒷바라지했다.
1925년에는 직접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권문대가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 가량 되니, 그도 받으면 그 시로 부쳤다. 매달 한 번씩은 무슨 돈이라는 건 말 아니하고 보내드렸는데, 우당장(이회영)께서는 무슨 돈인 줄도 모르시면서 받아쓰시니, 우리 시누님하고 웃으며 지냈으나, 이렇게 해서라도 보내 드리게 되는 것만도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다”
국내로 들어간 1925년부터 이회영이 순국하는 1932년까지 이 부부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다. 남편 이회영은 1932년 독립운동의 외연을 넓히고자 대련으로 갔다가 동포의 밀고로 일경에게 잡혀 고문을 받다 옥중 순국했다.
먼 타국에서 숨진 남편의 소식을 들은 이은숙 여사는 영원히 이별할 줄 알았더라면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죽을 때 같이 죽었을 것이라며, 생각만 해도 뼈가 녹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했다.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서로가 독립운동을 위해 피신하고, 군자금 마련을 위해 귀국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로 같이 산 것은 13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에게 수시로 집을 수색당하고, 억지혐의로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으며, 이웃의 눈치도 보아야 했다. 아들 규창이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된 뒤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복역할 때에도 옥바라지를 하며 해방을 기다려야 했다.
‘혁명 가족의 안주인’ 이은숙 여사는 2018년, 서거 후 39년 만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회영과 혼인하여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을 조력하고, 북경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후원하고, 국내에서 직접 독립운동자금 조달한 공과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은숙 여사는 일제강점기 남성들의 항일 독립운동사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 중 한 명이다. 비록 총칼을 들지 않았더라도 이들의 거룩한 삶은 독립운동을 지탱했던 튼튼한 버팀목이었다.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