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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인의 조건(상)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6.25 20:20 수정 2019.06.25 20:20

김 시 종 시인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시인의 조건이란 과연 무엇일까? 시단에 선을 보인 지 스무 해가 되도록(1987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생소한 명제임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불편이란 없다. 이제 자칫하면 남의 눈총을 받을 위험성이 다분한 ‘시인의 조건’을 내 나름대로 정의하고자 한다.
시인이란 말의 뜻을 나랏말씀 책에서 찾아보니 시인은 시를 잘 짓는 사람이라 되어 있다.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시도 못 지으면서 명함에만 시인이라 대서특필해도 부도시인(不渡詩人)에 불과한 것이다.
시인의 조건에 대해선 육법전서 어느 부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 시인의 조건 내지 자격은 비록 실정법의 규정은 없지만 문단의 관례상 외형적 조건은 주요 신문의 신춘문예 당선 내지 권위 있는 문예지의 추천완료 쯤 됨직하다. 속된 세상이 되어 외형적 조건을 내면적 조건보다 중요시하는 것이 요즘의 흐름인 것 같다. 외면적 조건도 갖춰야겠지만, 이보다 오히려 내면적 조건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먼저 시인은 시를 잘 써야 한다. 시를 많이 짓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라 좋은 시를 많이 창작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시도 못 지으면서 명함에나 시인이라 박아대는 골빈 작자야 어이 시인이랴.
엇쎄 귀신아 물러가라……
시인은 말(언어)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순교자가 신(神)을 사랑하는 이상의 언어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는 자는 시인 자격이 없음은 물론이고 시를 읽을 자격마저 없다고 하면 지나친 단정일까?
시인은 말을 무리하게 혹사해선 안 된다. 마부가 말을 혹사해선 안 되듯이 시인은 말을 무리하게 부려선 안 된다.
나의 소년시절에 이웃집에 마부가 살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부는 겨울밤이었다. 말이 우는 소리에 마부가 단잠을 박차고 일어나 등불을 켜들고 말을 어루만져 주면서 말에게 정성스레 덕석을 씌워주는 걸 보고 마부의 말 사랑에 깊은 감동을 어린 나는 짙게 느꼈다. 추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말을 따뜻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시인인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탐험을 겁내지 않듯이, 시인은 말씀의 신대륙을 찾아내기 위해 우리 고전을 섭렵하여 잠든 시어를 일깨우고 한글사전을 탐독하여 책갈피 군데군데 숨어 있는 순수한 토속어 정감어린 말을 부지런히 찾아내야 한다.  
시인은 인생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인생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의 인생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문학소녀를 미혼모로 만드는 주특기를 가진 시인이 있었다. 예순이 넘도록 객기를 졸업 못한 채 흙으로 환원이 되었다. 의사가 환자를 의술을 빙자해서 간음해선 안 되듯이 시인이 시를 빙자한 파렴치 행위도 용납을 받지 못한다. 진실하지 못한 시인이 더러 제작한 참된 시는 착각의 소산이라 생각해 본다.
문학은 인간 탐구의 미학인만큼 남을 짓밟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 모름지기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인간의 삶의 터전인 자연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서정시나 서경시에 안주하지 말고 삶의 희로애락을 맑은 목소리로 아니면 거친 목소리로든 간에 진실의 바탕위에서 절실하게 노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봄바람, 가을비에 잠 못 들어 하는 시인의 다정을 어이 단순한 불면증으로만 돌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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