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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거시기’는 귀신도 모른다지만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7.03 20:03 수정 2019.07.03 20:03

박 준 희
관악구청장

“박 청장, 레미콘이 안 돼. 레미콘 좀 고쳐주고 가”
“네??? 갑자기 무슨 레미콘이요?”
“아, 텔레비전 레미콘 말이여”
“아, 그… 뭐냐… 거시기 말씀이군요. 이리 줘보세요”
경로당에 들렀을 때 한 어르신께서 리모컨을 레미콘이라고 하시는 통에 필자 역시 리모컨이라는 단어가 순간 생각나지 않아 당황했다. 리모컨은 수리가 어려워 새것으로 교체하도록 조치를 해드렸다.
구청장으로 하루를 보내자면 구청이나 산하 기관들이 주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개최하는 이런 저런 행사나 각종 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해야 할 경우도 많고, 주민 단체들이 주최하는 행사나 경로당 방문처럼 여러 주민들과 악수를 나누며 개별적인 안부인사를 나누는 경우도 흔하다.
공적 성격이 강한 행사나 회의의 경우 시간에 맞춘 효율성이나 책임 있는 발언을 위해 미리 원고를 준비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주민 행사나 가벼운 만남의 자리 등에서는 즉석 인사말이나 정책적 발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라도 정확한 소통을 위해 기억하기 어려운 숫자나 이름, 지명 등 데이터는 미리 메모를 해서 간다.
문제는 주민들과 함께 하는 현장은 미리 짠 각본이 아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는 것이 일상 다반사다. 그중 가장 난감한 상황이 여러 주민들 앞에서 뭔가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해당되는 단어가 생각이 안 나거나 인사를 나누는 상대방의 이름 등 관련 정보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다.
특정 단어가 생각이 안 날 때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주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에둘러서 말을 하거나 주변 사람이 해당 단어를 살짝 알려줌으로써 위기 상황을 피해가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어려울 때는 예의 경로당 대화처럼 ‘거시기’라는 단어가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심지어 “거시기 있잖아요, 거시기”. “아, 네. 거시기 있죠. 그런데요?” 식으로 ‘거시기’ 단어만 가지고도 의사소통을 하는 경우 마저 있다. 신기한 것은 ‘거시기는 귀신도 모른다’지만 대부분의 ‘거시기한’ 대화가 서로 소통하고자 하는 내용과 거의 일치해 전달된다.
바로 오늘 있었던 일이다. 관내 어떤 행사에 참석했는데 한 주민께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구청장에 당선되기 전 구의원, 시의원 때부터 가끔 뵀던 게 분명하고, 지난 구청장 선거 때도 나름 열심히 응원하셨던 분인데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처럼 존함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반드시 호칭을 해야 하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는 만병통치약인 ‘거시기’마저 써먹을 수가 없다. ‘거시기 선생님’이라 부를 수는 없으니까.
이럴 때는 동행한 직원에게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묻거나 급한 전화 좀 해야겠다는 등의 구실을 들어 응급조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아이고, 홍길동 사장님. 말씀 계속 하시죠”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만약 이런 경우 구청장이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민 분께서 눈치라도 채면 여러 측면에서 낭패를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 이 같은 일이 있었던 터라 가끔 겪고 있는 ‘망각’에 대한 글을 써봤다.
그러니 혹시라도 어떤 내용이나 단어, 이름 등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앞으로 그런 일이 혹시 있더라도 ‘상대방은 만물 기억박사거나 천재가 아니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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