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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처녀 독립운동가 김경희 지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7.07 18:48 수정 2019.07.07 18:48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곧 이어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분 중 몇 명을 기억하고 있을까.
문화체육관광부가 연초에 발표한 항일 독립운동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김구(23.8%), 안중근(22.8%), 유관순(11.1%), 윤봉길(9.6%), 안창호(5%) 순이었다.
유관순 열사 외에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를 떠올린 이는 없었다.
이러한 국민인식을 대변하듯 2019년 기준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1만 5,180명 중 여성은 357명으로 전체의 2.4%밖에 되지 않는다.
그 분들 중에는 최초의 비밀 여성 독립운동단체인 송죽결사대를 직접 주도해서 만들고, 왕성하게 독립운동을 활동했지만 요절하는 바람에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감조차도 없었던 김경희 지사도 있다.
안타깝게도 김경희 지사는 어린 시절에 대해 그가 평양 출신이라는 것과 그의 가정이 일찍이 개화된 집안이라 자기 동생 애희와 함께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갔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가 신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등만 알 수가 있다.
당시 평양에는 선교사들이 교인 자녀들을 위해 세운 초급과정의 학교가 네 개 있었는데, 김경희 지사가 다닌 학교는 신양리에 있는 예수교 소학교였다. 이 학교는 이길성 선교사 소유의 ㄱ자형 단층 기와집이었다.
1903년에 이 소학교를 졸업한 김경희 지사는 바로 숭의여학교의 제1회 입학생이 되어 43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한층 심화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숭의여학교는 장로교 선교부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교인 자녀들의 지속적인 교육을 위해 설립한 이후, 성경, 산술, 지리, 물리, 화학, 수예, 음악 및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며 여성도 세상에 대해 눈을 떠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만들었다.
제1회 졸업생이 된 후 1908년  모교의 교사가 되어 수학과 지리 등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 숭의여학교 학생 및 교사로 있는 기간 동안에 러일전쟁, 을사늑약, 고종황제의 강제퇴위, 군대해산, 정미7조약, 한일합방, 105인 사건 등의 민족수난사를 직접 경험하면서 서서히 민족주의 독립사상으로 무장되고 있었다.
김경희 지사는 3년간 숭의에서 근무하다가 잠시 목포의 정명여학교에서 복무한 후 1913년 다시 평양의 숭현여학교 교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 숭의여학교 후배이자 이화여대를 졸업한 후 숭의여학교 교사로 와 있던 황에스더가 찾아와서 송죽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자고 했다.
그래서 숭의여학교 교사 황에스더, 이효덕, 재력가 교인 안정석 등과 결의하여 숭의여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송형제회와 재학생들로 구성된 죽형제회를 통괄해서 송죽(형제)회를 결성하였다. 김경희 지사가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이 비밀결사대는 3·1운동 이전에 국내에 있었던 유일한 독립비밀결사로 평가받고 있다.
이 송죽회는 겉으로는 친목회인 것처럼 가장하고 회비명목으로 일정액을 거두어 해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전국 조직화에 힘썼다. 이처럼 전국적 규모의 비밀결사를 지휘해 나가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한때 김경희 지사의 지리 수업에서 하얼빈 지명이 나오자 “이곳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우리나라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쾌살한 곳이다.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에는 이곳에다가 안 의사의 동상을 건립하자”라고 하니, 학생들은 감격과 울분으로 가득 차 숨죽이고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수업 내용은 1년 만에 발각되었고, 김경희 지사는 바로 경찰에 끌려가 수 주일 간 감금된 채 온갖 악형을 받아야 했다.
결국에는 고문을 견디다 못 해 심한 폐질환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평양의 만세시위는 태극기 제작과 배포를 준비한 송죽회의 치밀한 도움으로 남산현교회에서 초교파적으로 진행되었다.
경찰의 일제 검거에서 벗어난 김경희 지사는 상해로 망명해서 상해 임시정부의 조직과 활약에 매진했다. 이러던 중 임시정부의 지시로 평양으로 다시 귀환하여 평양의 감리교와 장로교의 애국부인회 통합에 나섰다.
당시 숭의여학교가 장로교, 감리교 연합운영의 학교였고, 송죽회의 회원들도 장로교, 감리교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두 단체의 통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김경희 지사의 건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3·1운동 전에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망가진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결국은 병상에서 울며 날을 지새우는 수밖에 없었으며, 독립운동에 대한 뜨거운 열의는 회복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정보를 입수한 경찰의 매몰찬 감시 아래 1919년 9월 19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임종 직전에 남긴 “나는 독립을 못 보고 죽으니 후에 독립이 완성되는 날 내 무덤에 독립의 뜻을 전해 주시오. 나는 죽어서도 대한독립의 만세를 부르리라”는 유언은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까지 전달되어 충격과 비탄에 잠기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또 한 분의 이름 없는 처녀 독립운동가가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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